작년 이맘 때, 처음으로 영국 런던에 가 보았다. 관광이 아닌 일 처리를 위해 방문한 것이라 딱히 구경거리를 찾아 다니지는 않았지만, 폐장 시간 직전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한 시간 정도를 보낼 수 있었다.
미술 교과서에 등장할 법한 유명한 그림들을 지나, 퇴실 방송을 들으며 잠시 멈춰선 것은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The Ambassadors)’ 앞이었다. 솔직히 서양 미술사 수업을 열심히 듣지 않아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프랑스 외교관들과 그들의 사명 같은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들 발 밑에 그려진 일그러진 형체가 해골이란 것만은 기억했다. 그림 앞에 서 있던 세 명의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나는 고개를 왼쪽으로 푹 기울여 해골의 모양을 확인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화가는 세상 모든 권력과 명예, 지성과 부귀도 죽음 앞에 사라진다는 교훈을 두 유력자의 발 밑에 수수께끼처럼 심어 두었다. 요한 호위징하는 ‘중세의 가을’에서 위와 같이 직접적으로 죽음에 대한 강박적인 의식을 표현하는 ‘죽음의 무도’적 정서가 중세의 끝자락에 널리 유행했음을 언급한다.
중세인들은 죽음을 고통의 끝이나 영원한 안식 같은 것으로 미화하지 않았다. 죽음은 오로지 무서운 것, 거칠고 두려운 종말일 뿐이었다. 호위징하에 따르면, 중세는 재앙이나 가난이 역겨울 만큼 가혹하고, 질병과 건강은 극단적으로 반대되며, 삶의 갖가지 모습이 잔인하게 백일하에 드러나 비참과 쾌락, 행복과 불행이 현대인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비되었다고 한다. 문득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는 잠시 중세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 모든 지구인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평소 외면했기에 존재를 부정했던 재앙과 가난, 비참과 불행의 실상을 역겨울 정도로 가혹한 통계로 확인하고 있다. 우린 모두 안다. 죽음은 우릴 차별한다. 인종과 사회적 지위, 재산의 정도를 따진다. 가난한 사람이 더 죽고, 흑인이 더 죽는다. 덜 버는 사람이 더 빨리 일자리를 잃고, 이민자들이 더 아프다.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의 한복판에서 죽음은 더 강렬하게 차별한다. 권력자는 이미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지, 마스크 쓴 평범한 우리를 비웃듯 맨얼굴로 활보한다. 우리에게 4월보다 잔인한 5월을 선물한 그에게 속삭이고 싶다.
메멘토 모리, 언젠가 당신도.
<
이현주(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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