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던 봄이 지나고 여름도 벌써 한창이다. 낯설기만 했던 새 세상은 평범한 오늘이 되었다. 이맘 때면 흥분된 마음으로 휴가 계획을 세우고 인터넷을 뒤지며 갖가지 여름 신상과 유행 아이템들을 구경하던 일은 올 여름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름 샌들과 나풀거리는 휴가용 원피스를 프랑스의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주문했다. 새 구두와 새 옷이 바다를 건너 도착하는 날에는 휴가를 떠날 수 있는 여름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몰래 집어넣어서. 시간이 꽤 지났고 프랑스에서 보내온 하얀 샌들과 예쁜 프린트가 그려진 원피스는 잘 도착했다. 하지만 나는 샌들 대신 운동화를 신는 여름을 보내고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화를 화사한 색으로 새로 하나 장만할 걸 그랬다.
오늘도 운동화를 꺼내 신고 걸으며 올 여름은 이렇게 나야함을 결국 받아들였다. 산책은 미국에 와서 잃어버렸던 활동인데 다시 하다보니 오래된 습관을 되찾은 기분이다. 운동을 하러, 머리를 식히러, 무료함을 달래러, 외로움을 날리러, 비타민 D를 얻으려, 그리고 생의 활력을 얻으려… 걷는다. 이른 아침의 산책 길에는 바람만 이야기한다. 청명한 지저귐이 들리고 간간히 멀리서 하이웨이를 달리는 차소리도 들린다. 발걸음이 지나가는 길에는 온몸 가득 머금은 볕을 생생하게 내뿜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지난 몇 년간 같은 길을 수없이 지났어도 보이지 않던 생명들이 눈에 띈다. 붉은 꽃이 달린 작은 선인장, 파랑과 보라가 함께 어우러진 꽃, 몸통은 늙었지만 가지의 잎들은 힘차게 펄럭이는 오래된 나무, 키다리 아저씨 같이 높이 뻗은 레드우드들. 낯선 일상에 출렁이는 마음이 그들에게 기대어 힘을 얻는다. 그러고보니 미국에 처음 와서 낯선 시간을 보낼 때에도 내 곁을 듬직하게 지켜주던 것은 이 푸르름이었다. 고적한 자연 속을 걷는 일, 그 걸음이 주는 평안은 이토록 익숙하다.
그러고보니 오랫동안 자연과 함께 걷는 법을 잊고 지낸 듯 싶다. 어쩌면 함께 공존하는 길을 배우는 중인 것도 같다. 자연과 함께 걷는 길, 그 길은 어떻게 가는 것일까? 사람들이 지구에게 이번 여름 휴가를 양보한 것처럼 앞으로도 많은 것을 양보하며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답은 모르지만 나는 오늘도 이 길을 걷는다.
<한연선 (더밀크 리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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