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혜련 언니를 통해서였다. 프랑스 깡(Caen)대학에서 박사과정에 있던 언니는, 일년에 한번씩 귀국할 때마다, 나와 마기자와 주기자의 불어를 점검해주던 대학시절 과외 선생님이기도 했지만, 늘 서너 발자국 앞에서 우리를 이끌어주던 멘토이자 선각자였다. 언니만 오면 문학과 연극, 미술, 무용, 음악 등 다양한 부족들의 대통합을 이룬 우리는, 5월에 만개한 꽃잎처럼 흩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했다. 삶이 경이롭기만 하던 때였다. 그렇게 축제처럼 우리에게 오고 갔던 혜련 언니는 청하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그르니ㅁ에 전집 시리즈에 동참해, ‘섬’을 비롯한 ‘지중해의 영감’과 ‘거울·계단’ 등 남국의 한 낯선 작가를 한국의 젊은 지성들에게 내놓았다.
그르니에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어떤 이름 없는 감정이 툭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것이다. 철학적 메시지가 담긴 다소 어려운 사색의 방식은,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투명한 것이 반짝거리다 이내 없어지고 마는 미지의 풍경처럼, 신비하면서도 내밀한 것이었다. 알베르 까뮈가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자신의 방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던 감동을 함께 느끼고 싶어 정성껏 읽었다. 그리고 마침내 신(神)으로 귀결되는 사유의 끝에서, 누군가는 말해 줄 필요가 있는 존재의 기쁨과 절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언젠가 소멸해 버릴 것이기에 소중한 생과, 그래서 아름다운 생을 절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그날 나는, 독자를 위한 까뮈의 애정어린 헌사와는 달리, 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듯한 당혹감에 어린애처럼 펑펑 울었다. 지금도 민망한 그 행위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처럼 존재의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는 긴 여운을 남기는 메아리가 되어, 지금도 마음이 들볶일 때마다 무심한 공(空)의 매혹 속으로 인도한다.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세월, 시간의 강물을 따라 온 우린 낮은 곳을 찾아 흐르며 생명을 품어 키웠다. 식구를 건사하며 뭉툭해진 손마디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이 하나 둘 늘어나던 주름들. 청춘의 붉은 뺨이 아름답지만 황혼의 주름진 손이 그보다 못하겠는가. 그렇게 30년을 함께 하며 갓난아기의 배내옷처럼 누렇게 바랜 책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상기시키며 세상의 정수를 스쳐간다. 비어 있으니 자유롭고 넉넉해지는 것이라고.
<신정은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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