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체력을 과대평가하고는 젊은 청년처럼 힘을 쓰다 어깨 근육을 다쳤다. 그것 좀 다쳤다고 이렇게 극심한 통증이 올 줄은 몰랐다. 잠을 잘 수도 없고, 누웠다 일어나는 일조차 할 수 없고, 걸을 때도 진동이 느껴지면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웃거나 기침을 해도 어깨 근육이 움직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른쪽 어깨가 아프니 왼팔이 일을 더 많이 하고, 또 다른 지체들도 역할을 더 맡아 움직였다. 다치고 나니 얼마나 사람 몸이 신기하게 만들어졌는지 다시금 깨닫는다. 더구나 다친 지체를 위해 다른 지체들이 협동하고 배려해 주는 모습은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다쳐서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자, 그 작은 부위로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도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살살 움직이면서도 모든 것에 고맙다고 말을 건넸다. 볼 수 있어서 감사하고, 왼손으로나마 뭔가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다리를 움직일 수 있어 감사했다.
감사하면서, 내 이 극심한 고통을 잘 인내하자 마음먹었다. 근래에 돌아가신 한 신부님께서 암 투병 중의 극심한 고통 중에도 인자하신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서 나도 흉내라도 내보자 생각했다. 그런데, 도저히 내 용량으로는 할 수 없었다. 저절로 신음소리가 배어 나오다 눈물이 다 맺히고 결국은 사나운 인상을 쓰게 되었다. 바로 포기를 선언하고 끙끙 앓았다.
그러나, 아프면서 하나 얻은 것이 있는데, 아픈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뉴스에서 손흥민 선수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그 고통을 헤아릴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다쳤나 보다 그러고 말았을 것인데, 뉴스에 간단히 부상이라고만 나오는 것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 사람도 극심한 고통과 행동의 제약, 게다가 경기 출전을 못하는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있을 터인데, 얼마나 힘든 시간일까 마음이 가닿았다. 위로라는 것, 공감한다는 것은 경험을 전제로 해야 제대로 된 위로요, 공감이다. 자식을 잃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그 당시 사람들의 위로 중, 그렇게 너무 울면 아이가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 위로가 더 속상했단다. 경험이 없으면 섣부른 위로는 하지 말 일이다. 그래서 상처받았던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더 잘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겪으며 알았다.
<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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