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선뜻 축하한다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게 대놓고 했던 예의 없던 말, 내 아이들에게 상처 주었던 일까지 태풍에 뒤집어진 바다처럼 밑바닥에 있었던 일들이 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자다가 잠시 깨도 중얼중얼 그때의 일들을 곱씹다 다시 잠이 들곤 했다.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옹졸한 사람이구나, 비참한 나를 바라보며 용서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느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용서한다고 할 때, 이미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그래서 네가 잘못했지만, 내가 너를 봐주겠다고 하면서 용서한다고 하는 거란다. 거기엔 이미 내가 너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로 이해라는 말은 "understand"인데, 말 그대로 밑(under)에 서있는(stand) 것이 상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용서라는 것은 겉만 번지르한 말이지, 실제로는 내가 너보다 위에 있고, 너는 내 밑에 있어서 내 너를 아무리 내려다봐도 이해할 수 없지만, 봐주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용서보다는 이해한다고 말해야 맞지 싶다.
생각이 갈피를 잡지 못할 때, 이럴 때 엄마는 어떻게 하실까 종종 생각을 하곤 한다. 지금 이 상황을 엄마에게 말하면, 엄마는 뭐라고 하실까 생각을 해보지만, 답은 분명하다. 엄마는 한 번도 누구와 부딪힌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서운한 마음이 생겨도 늘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하시며 따뜻한 마음을 거두시는 법이 없었다. 그저 내가 이해하면 된다고 하시면서 뭐든 좋은 쪽으로 생각을 하셨다. 내가 누군가에게 큰돈을 꿔주고 받지 못하게 생기자, 그 돈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라며 상대를 원망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늘 누군가의 밑에 서 계셨던 분이었다. 누군가의 위에서 내 생각이 옳다고 우기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엄마를 생각하고 나니, 더욱더 마음을 고쳐먹자 생각했다. 뭐 잘난 사람이라고 다른 사람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내 생각이 옳다고, 너를 이해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며 잠결에도 웅얼거리고 있는 건지 내 모습이 가히 가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성인은 또 아닌지라, 마음 고쳐먹는 일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나는 역시 비참한 인간이다.
<송일란 (교회 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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