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 전의 비 폭풍은 내 정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소나무도 몇 가지가 부러져 버렸고, 정성 들여 가지치기를 해 두었던 수국은 긴 비에 끝이 물러져 버렸다. 휘어지고 늘어지는 게 이 나무의 멋이라지만, 병솔나무(Bottlebrush tree)는 가지가 바람에 휘어져 빨간 꽃술 끝이 땅에 파묻혀 버렸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피해는 온실이었다. 센 바람이 불 거라는 예보에 온실 주위를 빙 둘러 벽돌도 몇 개 눌러 놓고, 모퉁이를 잡아 주는 끈도 단단히 붙잡아 맸지만, 바람은 생각보다 강했다. 막 바람이 시작됐을 때부터 쨍그랑 화분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삼단 선반 위의 화분이 절반 이상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고, 겨우내 정성을 들였던 화초들은 흙 속에 파묻혀 버렸다. 원래 화분에 큰돈을 들이진 않지만, 정말 몇 안 되게 애착을 가졌던 화분이 이번 비바람에 모두 깨졌다. 분홍 카네이션을 돋보이게 했던 복주머니 모양의 연녹색 화분, 하얀 바탕에 물망초 꽃처럼 잔잔한 꽃무늬가 고와 화초보다 더 눈길을 끌었던 파랑 꽃무늬 화분, 여행 중에 플리마켓에서 사 온 이국적인 화분까지 모두 다시는 쓸 수 없이 조각조각 깨져 버렸다.
흙더미에서 깨진 화분 조각을 골라내고, 뿌리가 붙어 있는 화초들을 찾아내 물로 닦고, 아픈 내 가슴, 상처 난 화초, 함께 다독이며 다시 심었다. 며칠 질척한 흙더미에 있었던 것들을 살리는 게 최우선 목적인지라 화초와 화분 크기만 맞춰 심었다. 그랬는데 며칠 지나 다시 보니, 일부러 맞춰 산 것처럼 조화롭다. 그동안 정원에서 귀한 대접 못받고, 그저 휘뚜루마뚜루 쓰였던 토분이었는데 말이다.
본래 토분은 도자기처럼 흙으로 만들어져 통기성이 좋고, 과습도 막아주고, 가격도 저렴해서 화분으로 좋다. 그래서 나 역시 처음엔 거의 모든 화분이 토분이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턴가 화초만큼 화분에 욕심이 생겼다. 점토 빛의 일률적인 토분 색이 꽃 빛깔을 죽어 보이게 하는 것 같았고, 꺼칠한 느낌 대신 반지르르하게 유약 바른 화분이 손에 착 달라붙어 좋았다. 뭘 심기엔 적당치 않아도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이쁜 화분에 평범해서 우직한 토분은 잊고 지냈다. 하지만 색다르다는 것들의 시작도 어찌 보면 평범함에서 출발하지 않았겠는가! 깨진 화분에 아직도 마음은 아프지만, 비바람에 휘뚜루마뚜루 토분을 얻었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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