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눈이 내렸다. 노랑색 눈이 내렸다. 이맘때면 우리집 마당에 내리는 특별한 눈. 송홧가루가 눈이 되어 내린다. 소나무의 종류는 조금씩 다르지만 내 마당에 두 그루, 옆집 마당에 두 그루 그리고 텃밭 너머 길가에 한 그루, 이렇게 가까이에 다섯 그루뿐인데도 매년 한 이주 동안은 소록소록 내려 마당 곳곳을 덮는다.
노랑 눈, 이 눈이 내린다는 건 이젠 내가 사는 이곳엔 비다운 비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고, 태양이 무척 뜨거워진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정말로 내 이웃들 마당엔 개나리색 파라솔 두 개가 펼쳐졌고, 더위를 식혀 줄 분수대가 물줄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또 내 정원의 그 화사하던 수선화와 고운 동백 꽃송이도 햇빛 속에서 금빛 가루처럼 반짝이는 송홧가루에 자취를 감춰 버렸다.
처음 몇 해는 나무에, 텃밭 채소에, 정원 탁자에 매일 덮이는 송홧가루가 싫었다. 햇살이 좋아 맘 먹고 널어 놓은 이불에 먼지처럼 내린 노란 가루가 정말 싫었다. 물로 열심히 닦아 보기도 하고, 털어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뿐. 싫다고 거부할 수 없는 게 자연이기에 난 순응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길어야 보름인 노랑 눈에 매일 마음 쓰고 사는 건 내 손해라는 생각으로 나를 다독이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적응이 되고, 또 그러다 보니 매년 비슷한 시기에 날리는 이 송홧가루를 잘 따져 텃밭을 꾸리는 요령도 터득했다. 씨앗으로 키운 깻잎 모종을 정묘하고, 토마토와 고추 모종을 심고, 당근을 뽑고, 미나리와 돌나물을 손가락 한마디만큼만 남겨 수확하고 영양제를 주는 것. 이 일들은 눈이 내리기 전에 해야 할 일임을 알았다. 그리고 가지를 심고, 꽃이 피기 시작한 케일과 쑥갓은 씨앗 받을 몇 포기만 두고 모두 거두는 건 송홧가루가 잦아지면 적당한 때라는 걸 자연에 순응하며 깨우치게 됐다.
바람에 온 힘을 다해 꽃가루를 날려보내야 하는 소나무 마음 헤아리며 더 이상 노랑 가루 타박 않고, 끝내지 못한 마당 일에 속상해도 말고, 노랑 눈 내리는 날, 난 잠시 쉬어 간다. 송홧가루 피하려니 생긴 시간이긴 해도 이 또한 자연이 주는 선물이라 여기고 온전히 받아 즐기니 여유롭다. 진정한 여유는 시간이 주는 게 아니라 마음이 주는 것이기에 올해도 난 편안히 눈을 즐긴다.
<박명혜 (전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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