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1685-1750)는 평생 그가 살던 곳에서 50마일 이상을 벗어나지 않았고, 늘 교회와 집만 오가며 작곡에 매진했었다. 그렇게 1500여 곡 이상을 작곡했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거의 연주되지 않았고 아들들에 의해 악보로만 보관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들은 오히려 아버지 바하보다 음악인으로서 훨씬 더 높은 인지도를 얻었었고,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는 아버지 바하는 완전히 잊혀지는 듯했다.
그 잊혀진 바하를 세상에 다시 알린 이가 바로 멘델스존(1809-1847)이었다. 멘델스존은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집안은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예술작품들을 취급하였는데, 특히 그 당시에 수집된 다양한 악보들을 보관하고 필사하는 일을 하였다. 덕분에 멘델스존은 어린시절부터 풍족한 환경에서 음악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멘델스존의 집안은 아버지 바하에게 악보를 물려받았던 아들 임마누엘 바하(C.P.E Bach)와 연이 닿아 있었기 때문에, 멘델스존은 바하의 잊혀진 악보들을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실제로 멘델스존은 14살 생일에 바하의 ‘마태수난곡’을 선물로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그는 이 곡을 연구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고 “반드시 이 곡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태수난곡’은 연주길이가 3시간이 넘고 70여개의 성악곡과 기악곡으로 구성된 대곡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5년간 그 곡에 매달리고 연구하며 그의 10대를 바쳤고, 마침내 1829년 그가 20살이 되던 해에 ‘마태수난곡’을 총지휘하여 청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게 된다. ‘마태수난곡’이 바하에 의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주되었던 1727년 이후, 이 곡이 100년만에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 곡을 시작으로 바하의 곡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바하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멘델스존은 바하의 재발견을 통해 음악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그리고, 바하가 마지막으로 섬겼던 성 토머스 교회에서 음악감독을 맡으며(1835-1847) 바하의 뒤를 잇다가 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Pianistar HJ
<박현지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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