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브리태니커 출판사에서 출간한 ‘서양식 예절’-에밀리 포스트 씀-이란 책이 있었다. 폰트도 작은 글자로 빽빽한 무뚝뚝한 책이었지만 왠지 언젠가는 나도 이런 격식을 차려 행동할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당시 초등학생인 내게는 많이 버거운 이 책을 손에 들고 여름방학 내내 씨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이 쓰일 당시(1922년 초판) 미국은 각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 이민자 중 자본을 축적한 신흥 부자들이 쏟아져 나올 때였다. 바로 그때 상류사회에 조신하게 편승하고자 했던 신흥 부자들에 필요했던 것이 이 책이었다. 뿌리 깊은 전통의 유럽계 가문을 자랑하던 미국의 상류층은 이 책을 읽고 실습(?)차 문을 두드리는 신흥 부자들의 예법에 어색해하고 천박함을 감추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자본력은 권력과 손을 잡고 사회적, 정치적 방향을 통제하고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신흥 부자라고 불리는 다소 비아냥 섞인 ‘졸부’라는 별칭이 따라다니던 이들의 다음 세대들은 누구보다도 세련된 예법과 매너를 갖추게 되면서 명실상부한 미국의 귀족이 되었다. 이제 이 당시 이 책을 읽으며 에티켓을 배우던 사람들의 가문을 지금 우리는 미국 명문가라고 의심없이 이야기한다. 예법이란 시대에 따라 변하고 계층에 따라 그 필요와 언어가 각기 다르겠지만 지금도 인간관계에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중요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한국판으로 출판된 이 책을 애타게 찾아 나선 끝에 한국의 어느 낡은 서점에서 발견해내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현대 우리말 문법에도 어긋나는 이 책을 굳이 손에 넣은 이유는 이제 나도 미국에서 서양식 예절이란 매너를 갖추고 살아야 최소한 나의 자녀와 그들의 자손들은 이 땅에서 우아한 모습으로 좀 더 세련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칭하며 예를 칭찬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렇듯 인간사에서 예법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나를 친근하게 여기게 하는 마법이 숨겨져 있다. 가끔 무례한 사람들을 보며 화가 날 때가 있지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지 않는가? 아주 오래된 예법 책을 손에 들고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모임에서 즐거워하고 있을 나와 내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꼼꼼히 읽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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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안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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