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전시장을 천천히 걷다 밑둥이 절단된 투명한 유리병들이 원형으로 바닥에 여럿이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것도 어둠 속의 바닥이 아닌 천장으로부터 내려온 빛이 밑이 잘린 유리병들을 투사하듯 바닥으로 깊게 쏘여진다면. 어떤 이는 빛에 빛나는 유리병을 볼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밑둥이 없는 그곳에 애써 마음이 갈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시장이란 공간은 그곳에 이름을 달고 놓이는 순간부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말을 걸 준비가 되어 있는, 살아있지만 교감의 시간까지 침묵을 지키는 밤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지도 모른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 전인 1969년,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가 세계적인 IT의 산실로 거듭나기 위한 태동이 움트던 그 시절, 19세기에 산호세의 랜드마크였던 도서관과 우체국 건물이 철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당시 산호세에 거주하던 소그룹의 아티스트들과 풀뿌리 활동가들은 건물 철거를 반대하였고 건물은 철거될 위기를 극복하고 시립 미술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건물은 현재 약 2,600여점의 영구 작품을 소장한 실리콘밸리의 대표적인 현대미술관인 산호세 아트 뮤지엄(San Jose Museum of Art)이다. 이곳은 소수의 후원자나 기증자에 의해 설립된 뮤지엄들과는 달리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아티스트들과 지지자, 자원봉사자들을 비롯한 시민의 애정으로 현재까지 운영되고 발전되어온 뮤지엄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이렇듯 시민들이 지켜온 산호세 아트 뮤지엄에서 최근 실리콘밸리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과 혁신 정신을 반영한 작품들을 위주로 한 ‘South East North West : New Works from the Collection”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장을 걷다보면 팔레스타인계 영국 작가 모나 하툼(Mona Hatoum)의 2001년 작품인 ‘Drowning Sorrows’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소수의 아티스트가 지켜낸 뮤지엄에서 오래된 작품들을 만날 때 투명한 유리컵들은 작가의 세계를 넘어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현재를 응시한 또 다른 마음의 소리를 끌어낼 것이다. 침묵을 건너선 발걸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김소형 (SF한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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