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한달 전, 병원 약국과 제약회사에서 취직 통고를 받아 어느 곳으로 가나 고려 중이었다.
하루는 약학대학 건물을 들어가고 있는데 조교 한 분이 다가왔다. “조교 자리가 새로 생겼어요. 주임 교수님한테서 들었어요. 졸업 후 이곳에 남아 조교로 일해 주겠어요?” 그분은 대답을 못하고 있는 나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보수는 다른 곳보다 적지만 조교로 일하면서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따며 모교에 남아 교수가 될 수 있으니까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고 대답해 주세요.”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을 했다.
“저를 추천해 주시니 고마운데요. 전 벌써 취직이 되어 그곳에 가서 일하기로 했어요. 죄송합니다.” 교수가 될 뻔했던 기회를 놓치다니 이렇게 우리의 인생은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때 나는 병원 약국을 골랐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니 돈을 벌고 싶었다. 난 왜 그 시절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을까?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매사에 근검 절약하며 사셨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어린 마음에 내가 부자가 되면 엄마가 기뻐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내 딸이 예일 의대를 졸업하고 산타클라라 카운티 병원에서 감염 전문의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병원에서 만들어 준 딸의 명함을 보니 전문의라는 명칭 외에 조교수(Assistant Professor)라는명칭이 더 붙어 있었다.
“네가 어째 교수냐? 대학에 가서 강의도 하지 않으면서”라고 물어보니 “제가 일하는 병원에 스탠포드 학생들이 와서 인턴, 레지던트 실습을 하고 있어요. 제가 가르치니까 그런 명함을 받은 거예요”라고 하였다. “네가 그냥 의사인 줄 알았는데 교수 직책까지 겸직하다니. 와! 우리 딸 대단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마취과 레지던트로 일하는 아들이 눈이 동그래져 나를 본다. “엄마가 교수를 좋아하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저도 의사도 되고 교수도 되는 쪽으로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아들 또한 엄마인 나를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걸 들었을 때 왠지 모르게 기뻤다. 한편으로 나 또한 예전에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하던 저편의 나의 무의식 세계가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나의 바라던 꿈을 이루었나? 언젠가는 돈을 많이 벌어 엄마를 기쁘게 만들고 싶었는데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다. 부자가 되는 게 진정 꿈이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나였나? 어렸을 때 엄마의 팔다리 주물러 드리면 미소지며 스르륵 잠이 드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가 기뻐하던 건 팔다리 주물러 주는 것이었는데….
꿈은 멀리 있지 않았고 바로 가까이에서 실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난 후에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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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버클리문학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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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 부자가 되는것이 보편 타당한 생각이였지요 그러나 허망한 것 아닌가요? 연봉 250만불 받는 변호사딸아이의 과한 세금 부과에 대한 불평을 보면 한 없는 욕망의 끝은 보이질 않는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