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살짝 비추어주는 2015년 영화‘브루클린’.
마틴 스콜시지 감독의 영화 <아이리쉬맨>에서 궁금했던 건 주인공이 이탈리안 마피아들 사이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이었다. 두 민족 사이의 갈등이 대단했다고 얼핏 들은 적이 있어서다.
앵글로색슨 토박이 노우 나씽들에게 괴롭힘 당하던 아이리쉬가, 스콜시지의 앞선 영화 <갱즈 오브 뉴욕>이 그렇다, 후발 이탈리안들에게 같은 행태를 반복하는 이민사의 악순환을 후속편으로 다뤘나 싶었다. 영화를 보니 그 세월은 훌쩍 건너뛰어 직접적인 충돌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리쉬맨’이라는 별명이 인상적으로 조직 내에 박혔다는 것은 그만큼 두 그룹 사이의 뜨악한 거리감은 남아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프로비던스 미 동부의 도시들에는 아이리쉬과 이탈리안의 갈등이 살벌했다. 거리에서, 부두에서, 공사판에서, 성당에서 시종 으르렁대던 관계였다. 말단 공무원 자리를 놓고 정치판에서도, 범죄조직 간에서도.
1840년대 감자기근에 몰려 대서양을 건넌 아이리쉬들은 빈곤이 부른 대량이민의 첫번째 파도다. 가톨릭을 혐오하는 신교도들의 땅에서 천대 받아가며 똘똘 뭉쳐 노조를 주도하고 경찰을 장악했다. 지역정치 진출도 뒷받침됐다.
그렇다고 자리를 잡았다고 느긋해 할 형편은 아니었다. 구두닦이, 공사판 노동자, 하역 인부에 아이리쉬들이 여전히 많았다. 1880년대 가난한 나라 이탈리아에서 이민자들이 대거 몰려들자 아연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적게 받고도 긴 시간 노동을 감내하는 이들에게서 일자리를 위협 받는 상황, 이건 이민사에 반복되는 이슈다.
둘 다 가톨릭으로 신앙은 같지만 믿음 안에 하나 되는 기적은 좀체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이리쉬들의 눈에는 이탈리안들의 성자 신앙, 축제 행태가 미신적으로 보였다. 내 눈에도 아이리쉬들의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행진과 그 사흘 뒤 성상을 앞세운 이탈리안들의 성 요셉 축제는 그 느낌이 다르다.
같은 성당을 쓰던 한 지붕 두 가족 시절, 신부들의 알력도 심했다. 이탈리안 사제들은 “왜 우리만 지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로마 교황청에 수시로 불만을 토로했다.
공사판에서의 싸움은 비일비재했다. 오죽하면 신문 사설로 “저들 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나?” 호소했을까. 1894년 브루클린 이글 지는 공사업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이쪽 길은 아이리쉬, 저쪽 길은 이탈리안 따로 일 시키라고.
이탈리안 노무자들을 마구 다루는 아이리쉬 십장, 패싸움을 방관하거나 노골적으로 동족 편을 드는 아이리쉬 경찰…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둘 사이에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피우기는 어려웠다. 1920년대 한 조사에 따르면 뉴욕의 아이리쉬는 이탈리안과 혼인 맺기보다는 차라리 독일계 유태인을 배우자로 택한다고 했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동족을 등쳐먹던 양아치들 간의 영역싸움도 이어졌다. 종국적으로는 마피아가 전국구가 됐지만 아이리쉬 몹(Irish Mob)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다. 조직범죄를 개화시킨 1920년의 금주령 이전에도 부두 이권을 놓고 아이리쉬의 흰손파(White Hand Gang)와 이탈리안 검은손파(Black Hand: Mano Nera) 간의 죽고 죽이는 전쟁이 치열했다. 검은손이란 조직명은 드라마 속에서 송중기가 연기하는 빈센조 변호사도 자주 쓰는 협박장의 손그림에서 연유했다고 하는데 나야 법 없이 살 사람인지라 이 정도까지만.
이런 배경에서 가난하고 못배운 남부 유럽과 동부 유럽 이민자, 다시 말해 이탈리안과 러시아 유태인에 대한 편견은 결국 1924년 쿼터제 도입을 통한 이민 억제로 이어졌는데 그게 1965년 이민법 개정까지 계속된다. 한인들의 본격 미국이민은 그 이후다. 이것도 여기까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두 그룹은 미국에 정착을 하게 되고 알력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어느 정도 먹고 살게 되면서 밥그릇 싸움에 매달리지 않아도 됐으니까. 처음에는 이탈리안을 반대하던 노조 지도자들이었지만 자본에 맞서 조합원 확보를 하려면 그들을 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은 한참 뒤인 1990년대에도 재현되었다. 싼 임금을 노리는, 상공회의소로 대변되던 친이민 그룹에 반대해 오던 노조가 반발의 목소리를 낮췄는데 그건 새로 유입되는 라티노 노동자들을 조합원으로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세대가 바뀌면서다. 성당을 같이 다니고, 가톨릭 학교에서 같이 배우는 2세, 3세들에 이르러 장벽은 허물어지고 아이리쉬-이탈리안 커플들이 자연스레 늘었다. 교실이 화해의 울타리가 된 셈이다. 이제는 그때 그 시절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은데 이민의 역사를 교과서처럼 보여주는 사례가 이 두 나라 출신들의 애증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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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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