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의 골목마다 시간이 머무는 마을, 크베들린부르크.
우리는 지도를 펼칠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굵은 글씨로 인쇄된 도시들의 이름이다.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같은 도시들. 그러나 진짜 여행은 그 이름들 사이에 숨어 있는 여백에서 시작된다. 지도 모퉁이에 점처럼 찍힌 마을들, 익숙하지 않아 더 오래 기억되는 그곳. 거기엔 거창한 기념비도, 미술관도 없다. 그러나 덩굴이 감싼 창문 하나, 기울어진 돌담 하나가 천천히 말을 건다. “나는 시간을 품고 있다"고. 두 칸짜리 열차가 들판을 가로지르다 멈추는 순간, 비로소 진짜 여행이 시작된다. 이름 없는 마을의 느린 거리에서, 우리는 빠르게 흘러가는 삶의 속도를 잠시 잊는다. 그리고 그 느림 속에서, 더 뚜렷하게 자신을 기억하게 된다. 독일의 아름다운 마을들을 소개한다.
크베들린부르크 (Quedlinburg)
독일 중세의 숨결과 황실의 권위, 권력과 신앙의 교차로였던 이곳은 여성 성직자들의 전통까지 간직한 도시다. 돌길과 목조 건물, 언덕 위의 성 세르바티우스 성당에 이르기까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에서 중세 유럽의 숨결이 오늘도 이어진다. 2,100여 채의 목조골조 건물은 마치 오래된 동화책을 펼쳐 놓은 듯,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Garmisch-Partenkirchen)
알프스 자락에 자리한 이 마을에는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사랑한 풍경이 있다. 추크슈피체의 웅장함과 파트나흐 협곡의 고요함이 공존하는 이곳은, 맑은 공기와 '루프트말레라이’ 벽화로 장식된 목조주택들이 알프스 햇살 아래 반짝인다. 마을을 걷다 보면, 자연과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온 흔적이 길가마다 배어 있다.
뤼데스하임 (Rudesheim)
라인강과 포도밭이 어우러진 이곳은 천년 넘게 와인 향이 머문 마을이다. 드로셀가세 골목길을 따라 늘어선 반목조 건물들은 마치 와인잔처럼 오랜 풍미를 품고 있고, 브뢰머스부르크 성은 강과 마을을 부드럽게 내려다본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면, 니더발트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첼레 (Celle)
르네상스와 바로크가 포개진 첼레 성은 마치 시간의 책장을 넘기는 듯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400여 채의 목조 가옥이 줄지어 선 거리에는 옛날 장인의 손길과 오늘의 삶이 겹쳐 흐르고, 성 앞 잔디밭에 세워진 말과 조련사의 동상은 인간과 동물의 오래된 교감을 조용히 이야기한다. 근교에 자리한 국립 종마장은 여전히 그 전통을 지키고 있다.
오버아머가우 (Oberammergau)
390년 전통의 예수 수난극이 열리는 마을. 흑사병으로부터 마을을 지켜달라던 기도가 지금도 살아 숨 쉬며, 10년마다 마을 주민 모두가 배우가 되어 5시간 넘는 무대를 완성한다. 그들이 세운 약속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았고,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객들은 이 작은 마을의 무대 위에서 신앙과 공동체의 힘을 마주한다.
에슬링겐 암 네카어 (Esslingen am Neckar)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네카어 강가에 자리한 조용하고 아름다운 중세 도시. 에슬링겐 성에 오르면 포도밭과 붉은 지붕이 어우러진 구시가 풍경이 한눈에 펼쳐진다. 1286년에 완공된 오래된 돌다리와 세 채의 고딕 교회는 시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예술의 흔적이다.
바하라흐 (Bacharach)
중세의 성곽과 돌담길, 라인강을 내려다보는 풍경이 어우러진 마을. 낯선 돌길을 걷다 보면, 시간이 조금씩 느려지는 걸 느낀다.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는 라인강은 고요하고, 1368년에 세워진 알테스 하우스는 지금도 전통 음식점으로 그 자리를 지키며, 과거와 현재가 나란히 앉아 있다.
독일의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들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번에는 지면상 이 정도만 소개한 것이다. 작고 아름다운 마을들을 돌아보며 느낀 것은, 도시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는 평화로움과 여유다. 이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도 있다. 언젠가 독일을 여행하게 된다면, 이름 없는 작은 마을들을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찬란한 것은 언제나 중심이 아니라, 그 주변의 조용한 햇살 속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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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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