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잊히지 않고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하는 기억이 있다. 어린 시절, ‘이야기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날이야기다. 이야기 할머니는 외할아버지의 막내 여동생이다. 부산 친지들을 방문할 때마다 우리 집에 하루이틀 머무르곤 하셨는데, 나는 늘 할머니의 이야기보따리가 열리기를 기다렸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던 그 목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하다. 호랑이가 떡을 달라고 하고, 천도복숭아 속에서 아기가 태어나며, 도깨비가 뒷간과 산길에서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밤이면 싸리 빗자루가 도깨비로 변해 돌아다닌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같은 이야기라도 할머니의 구수한 입담은 언제나 새로웠다. 어린 내게 그 목소리는 마치 요술 방망이와도 같았다.
세월이 흘러, 그때의 “옛날 옛적에”를 떠올리게 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뮤지컬 영화 〈K팝 데몬 헌터스〉다. 한국적 설화와 상징을 K팝이라는 가장 현대적인 문화와 연결한 작품이다. K팝 걸그룹 헌터릭스가 노래로 악귀를 물리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해내는 이야기다. 얼핏 엉뚱한 설정 같지만, 그 안에는 두려움과 수치심에 시달리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위로가 담겨 있다.
작품 속 악귀는 우리 안의 어둠을 형상화한다. 두려움과 죄책감을 부추겨 영혼을 망가뜨리는 존재. 그러나 헌터릭스의 노래는 그 어둠을 몰아낸다. “상처는 나의 일부, 거짓 없는 나의 목소리, 이게 진짜 내 모습이야”라는 가사는 자기 결점을 받아들이는 용기, 부끄러운 모양새마저 삶의 일부로 인정하는 태도, 그것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선언으로 들린다. 나이 먹은 나에게도 스며드는 메시지다. 어린 시절 도깨비 이야기가 상상력을 키워주었다면, 영화의 데몬 헌터스는 상처 난 마음을 다독여 준다. “깨진 조각 속에도 빛은 있어.” 두려움 속에서 희망을 건네고, 상처를 빛으로 바꾼다.
음악은 세대를 넘어, 또 국경을 넘어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지고 결국 우리 모두를 구원하는 노래가 된다. 영화의 OST ‘골든’이 빌보드 차트와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고 다른 곡들도 10위 권에 올랐다는 건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말일 게다.
영화의 인기가 하늘을 뚫고 우주로 뻗어 나갈 기세다. 단순한 애니메이션에 머물지 않는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굿즈가 매진되고, 시카고에는 캐릭터 버스가 등장하며, 주제가를 떼창으로 부르는 영상이 반복된다. 8월 말부터 북미와 유럽에서 ‘Sing Along’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수많은 관객이 하나의 목소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조카와 함께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의 싱어롱 상영관에서 퀸 음악을 따라 부르던 기억이 새롭다. 이번엔 K-컬처의 힘을 벅차게 경험할 것 같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씀이 최근 몇 주 동안 〈K팝 데몬 헌터스〉를 통해 피부에 와닿는 느낌이다. 소중한 문화의 선물이다. 상처를 빛으로 바꾸는 노래, K팝의 힘이 세상의 빛이 되는 지금 이 순간을 덩달아 만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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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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