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책방에서 ‘페르세폴리스’라는 제목의 책을 보고 반가웠다.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의 옛 수도다. 나는 어릴 적에 이란에서 산 적이 있다. 1979년 1월 이란의 국왕 팔레비가 신병 치료를 이유로 이란을 떠나고, 2월 호메이니가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서 혁명을 지휘하며 이슬람을 근본으로 하는 나라를 만들던 때다. 우리 가족은 그해 가을에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도착했다. 중학교를 갓 시작했던 나는 새로운 곳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매일 반미 시위가 있었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카터의 인형이 수모를 당했으며 성조기는 불에 타올랐다. 반미 감정이 점점 강렬해지고 급기야 11월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이 점거되고 직원들이 인질로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화 ‘아르고’는 이 당시를 그린 영화다. 12월 구소련이 이란의 이웃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전쟁의 여파는 이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1980년 4월 미국 대통령 카터가 인질들을 구출하려다 무참히 실패했다.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매일 해가 질 무렵이면 신문지 몇 장을 겹쳐 이어 붙여서 창문마다 테이프로 붙였다. 공습으로 유리창이 깨질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불빛이 새어 나가기를 방지하기 위하기도 했다. 해가 질 무렵에 붙였던 신문지는 아침이 되고 해가 뜨면 떼었다. 전쟁이 계속되자, 물자난이 시작되었다. 동네 수퍼마켓에 식료품이 줄었다. 어느 날 저녁상에 오른 닭볶음탕의 닭 뱃속에는 달걀노른자가 몇 개 들어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장면이라 나는 비위가 상해서 더 이상 음식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 산란을 위해 기르는 씨암탉을 팔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만큼 물자난이 심각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 중이었어도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상으로 나는 투덜거렸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페르세폴리스로 여행을 갔다.
1981년 이란은 남한과 거리를 두고 북한에 좀 더 가까워지게 되었고,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우리 가족은 여름에 부랴부랴 짐을 쌌다. 이란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영국의 런던은 때마침 성대하게 치러진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결혼식으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세기의 결혼식으로 불린 결혼식이었다.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유명한 약혼 사진은 눈길이 가는 곳마다 걸려 있었다. 황태자비의 푸른 색 원피스와 거대한 사파이어 약혼반지가 빛나는 사진 말이다. 나는 거의 2년 동안 혁명과 전쟁과 불안한 매일매일을 겪다가 비행기를 타고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올 수 있었다. 런던에서는 전쟁의 냄새는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내가 이란에 있었던 2년 동안 한국에서도 엄청난 상황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9년 10.26 사건, 12.12 사태를 거쳐 1980년 5.18 항쟁까지 이어진 격동의 시기였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나름의 격동적인 시기를 겪던 나는 알지 못했다. 트럭에 올라타서 장총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이란 뉴스에 몇 번 등장했고 뉴스 진행자의 이야기 속에 “꼬레아”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한국 사람들인지는 알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불안했지만 정보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영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평행우주에서 살고 있는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만나는 내용이다. 평행우주나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하는 영화에는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살아도, 평행우주에 가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서 비슷한 일을 겪을 것이라는 컨셉이 가끔 등장한다. 같은 시기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던 한국에서 마치 평행우주처럼 이란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완전히 다른 평행우주였다. 인터넷 이전의 시대는 이렇게 같은 세상에서도 이란과 한국과 영국에서 평행우주처럼 서로 까마득히 모르는 역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알았겠지만.)
2025년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나는 한국, 이란, 영국에서 벌어지는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 들을 수 있다. 같은 지구 위에서 평행우주처럼 살던 인류가 인터넷으로 하나의 세상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더라도 실시간으로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타고 퍼지는 가짜 뉴스, 거짓 정보로 이제는 바로 옆에 있어도 서로 완전히 다른 우주를 살고 있는 것 같다. AI가 만들어 내는 세상은 하나의 지구에서 무한개의 평행우주가 동시에 공존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하나 떨어져 있는 우리는 그만큼 더욱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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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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