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생각을 바꿨다. 이에 대해 조롱을 퍼붓는 이들이 있다. 기후 변화라는 주제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란 스스로의 판단이 아니라, 만들어진 여론을 그대로 흡수한 ‘전해 들은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이츠는 최근 긴 온라인 글에서 기후 변화의 중요성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는 “사회가 가진 한정된 시간과 관심, 자원, 재정을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관련이 있다. 특히 우리가 이미 잘할 줄 아는 일, 즉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에 비해, 기후 변화 대응이 과연 얼마나 효율적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게이츠의 주장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타당하다. 설령 그가 이 문제를 제기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트럼프 행정부의 인도적 해외 원조 삭감, 전염병 대응 축소, 그리고 반백신 성향 인사를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80억 명이 넘는 인류의 활동이 지구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변화가 얼마나,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그중 일부는 녹지 확산처럼 긍정적일 수도 있다)는 아무도 모른다. 기후 모델의 예측력은 제한적이므로, 신중함이야말로 현명함이다.
하지만 신중함과 냉정함은, 안락한 사람들의 신념을 위해 취약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과는 다르다. 게이츠는 한 저소득 국가의 사례를 언급하며 이렇게 지적했다. 선진국들의 ‘배출 감축’ 열풍에 동참한 그 나라 정부가 합성 비료를 금지했더니 농민들의 생산량이 급감했고 식량이 부족해지며 물가가 폭등했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의 발전은 건강 개선과 안정적 경제 성장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잉여를 만들어내는 모든 경제는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으며, 당장은 이를 대체할 실질적 대안이 없다.
게이츠가 이렇게 입장을 바꾼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그는 한때 인류가 기후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하며 과도하게 반응했던 흐름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랄프 월도 에머슨이 말했듯, “어리석은 일관성은 좁은 마음의 요정이다.”
게이츠의 ‘넓은 마음’은 불편한 증거를 받아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그는 오늘날 이념에 취한 지식인들이 보기 드문 덕목, 즉 지적 책임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그의 문제 제기는 기후 담론을 ‘넷 제로’ 같은 비현실적 목표에 대한 제스처에서 벗어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실용적 계산법으로 옮겨가게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게이츠는, 2100년까지 산업화 이전 대비 2~3도 상승할 수 있는 지구 온난화로 ‘가상으로’ 위험에 처한 수십억 명이 아니라, 현실에서 죽어가는 수백만 명, 특히 젊은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그 정도의 온난화가 일어난다 해도, 이는 2100년의 전 세계 GDP가 약 2% 줄어드는 수준일 수 있다. 결코 사소한 손실은 아니지만, 인류의 ‘존망’이 걸린 위협과는 거리가 멀다.
인류의 고통을 줄이는 데 있어 역사상 두 번째로 중요한 발전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강력한 후보는 1980년 천연두의 박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발전은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화다. 20세기 중반 이후 자유로운 상품, 서비스, 지식의 교류가 가능해지면서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자유무역은 18세기 이전 인류 역사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개념, 즉 지속적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무역이 가속화되면서 그 효과는 더욱 커졌다. 1950년 당시 세계 인구의 약 60%가 하루 2.15달러 이하로 사는 ‘극빈층’이었으나, 오늘날 그 비율은 8.5%로 떨어졌다.
언젠가 역사는 1990년에서 2025년에 걸친 ‘기후 히스테리’를 차분히 기록하게 될 것이다. 어떤 역사가들은 이를 1637년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광풍’과 비교할지도 모른다. 당시 희귀한 튤립 구근 몇 개의 가격이 네덜란드 평균 연 소득의 여섯 배에 달했다가 거품이 꺼졌다. 다만 기후 히스테리는 대중보다는 엘리트층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일반 대중은 기후 변화를 이유로 막대한 세금을 내거나 불편한 생활 변화를 감수할 만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사회학적 현상’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지식인 계급의 사회학: 영향력이 줄었다고 느끼는 많은 지식인들이 종말의 예언자로 관심을 얻고자 한다. ▲정부의 사회학: ‘존재론적 위기’를 명분으로 연구 자금을 지원하면, 지원하는 쪽의 권위가 강화된다. ▲과학의 사회학: 정부 보조금으로 유지되는 ‘합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에게는 안정적인 자리가 없다. ▲학계의 사회학: 인문학 교수들은 프루스트를 몇몇 학생에게 가르치는 대신, 기후변화를 ‘중산층의 탐욕에 대한 응징’으로 해석하며 대중의 양심 역할을 자처한다. ▲초중등 교육의 사회학: 3학년생에게 구구단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들에게 ‘죽음의 미래’를 가르치는 것이 공익적이라고 여겨진다. ▲언론의 사회학: “대중의 무책임 때문에 종말이 다가온다”고 보도하는 일은 상을 보장받는 커리어 루트다.
빌 게이츠의 산업이 디지털 미래를 열어가던 시기에, 기후 위기 저항 산업은 커져왔다. 그러나 그 흐름은 이제 점차 바뀌고 있다. 게이츠의 영향력은 커질 것이며, 과도한 기후 담론의 시대는 그만큼 힘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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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F·윌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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