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송화 씨앗을 받는다. 까맣게 영글은 씨가 너무 작아 날아갈세라 조심스럽다. 이 꽃은 주인을 잘못 만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한 생을 화려하게 완성했다. 첫여름에 만나 가을이 저물어가는 지금까지 내 곁에 머물며 의미가 되어 주었다. 이제 계절의 순환에 꽃잎이 시들어 간다. 마지막 영혼을 버무려 생명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씨주머니를 따내며 내년을 기약해 보나 가슴이 시리다.
나는 삶 속에 리듬이 깨어질 때 꽃으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그날도 어찌하여 찾아간 곳이 화원이었다. 각양각색의 꽃들을 살피며 숨길을 트다가 시선이 멈춘 곳은 모종트레이에서 손가락 정도로 자란 어린 채송화였다. 고향집 토방 밑이나 장독대 주변에서 흔히 보던 꽃, 누구의 돌봄도 없이 연약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던 꽃, 지나간 날의 추억이 묻어있는 채송화를 집으로 안고 왔다.
아침이면 페리오에 나가 화분 속에 손가락을 넣어 본다. 흙이 마르지 않았는지, 햇볕은 골고루 받고 있는지, 진디물이 생기지 않았는지 관심을 가지고 살펴 본다. 또한 잊지 않고 예쁘다 속삭여 주면 꽃들은 빛을 발한다.
물을 뿌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뜨거운 햇살을 견디려면 시원하게 샤워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참아야 한다. 사랑을 절제하지 못해 가슴 아픈 일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대상이 누구이든지 처음 만나면 밀월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채송화와 사랑에 빠지니 자꾸만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다. 물을 자주 주고 영양제도 타 먹이며 빨리 자라거라 속삭였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백일홍과 금잔화는 물오른 새악씨 같이 화사해지는데 정작 채송화는 나날이 꽃대가 맥을 못추었다.
쌀뜨물이 화초에 좋다고 하던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빨리 기운 차리라고 쌀뜨물을 만들어 흠뻑 주었다. 그러나 기대감을 가지고 다음날 보니 여린 잎들이 폭삭 녹아내려 있는 것이 아닌가. 가엽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시야에서 치워 놓았다.
이삼 주쯤 지났을 때다. 무심히 내다본 창밖 구석진 곳에 화분 가득 꽃을 피운 채송화가 눈에 들어왔다. 역경을 딛고 혼자 힘으로 피어난 것이다. 나는 어찌나 놀랍고 기뻣던지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마, 미안한 마음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의 가을에 서서 지난날을 되돌아 보니 자식들에게도 채송화 사랑을 한 것 같다. 때로는 맹목의 사랑으로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진리를 알면서도 눈을 감았다.
거미는 새끼들에게 자신의 진액을 토해 먹여 키우다가 끝내는 몸마져 내어주고 생을 마친다 한다. 곤충도 그러하거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인지상정이 아닌가.
부모 자격시험이라도 있었으면 공부해서 아이들 각자의 적성에 맞는 올바른 교육을 했으려나.
딸이 죽기보다 싫다 하여 중단 했던 피아노를, 다 늦은 오십 줄에 들어서서 쇼팽의 녹턴(야상곡)을 연습하고 있다. 내버려 두었어도 자신의 인생을 달빛처럼 부드럽게 지휘하며 살았을텐데 그때는 왜 그리 힘을 썼을까. 가을은 이래저래 인생의 반성문을 쓰게 하는 계절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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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옥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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