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2년 11월 24일 네덜란드의 탐험가 아벌 얀스존 타스만이 오스트레일리아 동남부의 제법 큰 섬에 상륙했다. 이 섬은 1856년 그의 이름을 따라 태즈메이니아가 됐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마르코 폴로가 말한 ‘황금의 섬’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두 척의 배와 110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금을 찾지 못한 채 섬을 떠났다.
이 섬이 유럽인의 관심을 다시 끈 것은 1777년 제임스 쿡 선장의 발견 후였다. 1803년 형무소 설립과 함께 영국인의 정착이 시작됐다. 영국은 이 섬을 ‘주인 없는 땅(terra nullius)’으로 간주하고 7만 명이 넘는 죄수를 보냈다. 백인 정착민이 늘어나면서 원주민과 갈등이 쌓여갔다. 1825년부터 1831년 사이에 절정에 달한 ‘검은 전쟁’으로 1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전쟁이라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피해는 일방적이었다. 원주민 희생자 비율이 4배였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 백인과 원주민 충돌로 발생한 희생자 비율이 1대10에 달했기 때문에 공포감에 사로잡힌 백인들은 원주민에 대한 절멸을 요구했다. 그 결과 1828년에 3년 시한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1830년에는 정착민과 군인·기결수로 구성된 3200명의 무장대가 3.5m 간격의 블랙라인을 조직했다. 6주간 전개된 포위 작전으로 섬 전체에서 생존한 원주민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모두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플린더스섬으로 이주됐다. 1847년에 수용소가 폐쇄될 때까지 생존한 원주민은 46명이었다. 낯선 환경과 질병이 원인이었다. 1876년에 마지막 원주민 여성이 숨지면서 ‘순수한’ 원주민은 절멸됐다. ‘종의 기원’의 저자 찰스 다윈이 태즈메이니아를 방문한 뒤 쓴 일기에서 백인들의 악행과 종의 멸절을 우려한 지 42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태즈메이니아는 1901년에 호주 연방의 한 주로 편입됐고 1990년대부터는 과거사의 진실 규명이 진행됐다.
<최호근 / 고려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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