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해유행(漁蟹流行)
▶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물고기와 게가 나들이 하다) 간송미술관
물속 세상 답답하여 물 위로 올라오니
햇살이 이다지도 밝은 줄 몰랐었네
눈이 부셔 다른 한 눈 물속에 숨겨두고
한 눈으로 조심스레 세상 구경하는구나
푸른 풀과 푸른 나무 신기할 뿐이로다
게 두 마리 살금살금 옆으로 기어 와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웃으며 놀려대네
몸만 크면 뭐 하나 겁쟁이 잉어 양반
잉어와 게는 예로부터 길상(吉祥)의 그림 소재로 널리 사랑받았다. 잉어는 험준한 용문(龍門)의 급류를 거슬러 올라 마침내 용이 된다는 등용문(登龍門)의 전설을 지녔고, 게는 한번 물면 좀처럼 놓지 않는 습성 때문에 “과거시험에서 좋은 기회를 꽉 붙들라”라는 뜻을 지닌 선물로 양반사회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오원 장승업의 작품 <어해유행>에 등장하는 잉어는 길상의 상징이 지니는 영광의 서사(敍事)와는 사뭇 다른 정서를 품고 있다.
그림 속 잉어는 잔잔한 연못가에 조심스레 다가와 수초 사이에 몸을 숨긴 채, 누운 듯한 자세로 오직 한쪽 눈만을 물 위로 내밀고 있다. 그 눈은 경이(驚異)와 두려움이 뒤섞인 모습으로 마치 살아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한다. 물 밖 세상의 푸른 나무, 빛나는 태양, 그리고 하늘은 물속에 사는 잉어가 처음 마주한 새로운 세상의 풍경이지만, 그곳은 결코 그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이 장면은 우리 삶의 단면과도 닮았다. 우리도 때로는 미지의 신세계(新世界) 앞에 서서 황홀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순간을 마주한다. 장승업은 바로 이 ‘경계의 감각,’ 즉 한쪽 눈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두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바라보는 존재의 긴장을 예리하고 원숙한 필치로 그림에 담아냈다.
이러한 경계와 차원의 문제는 이론물리학에서도 중요한 주제였다. 뉴욕시립대학의 이론물리학자였던 미치오 카쿠 (Michio Kaku) 교수는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을 넘어서는 고차원의 영역인 ‘초공간(Hyper Space)’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카쿠 교수는 물고기가 물 밖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인식할 수 없듯, 인간에게도 본질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유(思惟)를 펼친다. 만약 물고기가 낚싯바늘에 걸려 잠시 물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물속으로 돌아간다면, 물속의 다른 고기들은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에 경악할 것이다. 카쿠는 이 예시를 통해 상이한 차원의 존재들은 서로의 세계에서 살 수는 없으나, 극히 짧은 순간만큼은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장승업의 잉어는 바로 그러한 차원의 문턱에 선 존재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세상의 경계에서 새로운 차원의 세상을 엿보지만, 다시 물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순간의 경이와 두려움이 잉어의 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한 오원의 천재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에는 잉어와 대조적으로 또 다른 길상의 상징인 참게가 등장한다. 게는 물속에서 살지만, 잉어와 달리 물 밖에서도 한동안 활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잉어가 경계의 지점에서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낯선 세상을 엿보는 동안, 그림 속의 두 게는 마치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여유롭게 걸어간다. 이는 게가 이미 물과 육지, 두 세계의 경계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 게는 오원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비록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 신분이었으나, 양반과 선비들의 영욕과 고난의 삶을 곁에서 냉철하게 관조할 수 있었던 천재 화가였다.
과거급제는 조선 젊은 선비들에게 일생일대의 목표였다. 그러나 출세의 영광 뒤에는 언제나 시련과 위험이 도사렸다. 그렇기에 잉어가 신세계의 존재에 눈을 크게 뜨고도 겁먹은 표정으로 머무는 모습은, 당시 양반들이 맞닥뜨렸던 출세에 대한 냉엄한 현실을 두려워하는 모습과 닮았다.
또한 오늘을 사는 우리도 삶의 중요한 전환점, 즉 새로운 차원의 문턱에 달했을 때 설레면서도 두려움으로 주저할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경험하곤 한다. 그러한 모습은 시공을 떠나 오원의 <어해유행>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는 잉어의 눈빛, 자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복(福)을 비는 그림에서 탈피한 <어해유행>은 삶의 본질을 꿰뚫은 오원의 깊은 통찰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그의 가장 빛나는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joseonkyc@gmail.com
<
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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