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장생도(十長生圖)
▶ <이건희 컬렉션> 국립중앙박물관
새해의 붉은 해가 동녘에 떠오르면
학들은 힘차게 산을 넘어 날아가고
사슴은 떼를 지어 송림(松林)사이 뛰어가서
개울에서 헤엄치는 거북이를 만나네
상서로운 흰 구름은 흩어졌다 모여들고
쏟아지는 폭포수는 생명수가 된다네
영지(靈芝)의 서기(瑞氣) 속에 늙음조차 길을 잃고
동방삭의 천도(天桃) 열매 가지마다 풍성하니
천 년의 바위처럼 우리 삶도 굳건하리
십장생도(十長生圖)는 변하지 않고 오래 사는 열가지 이상의 자연, 즉 해, 구름, 산, 바위, 물, 소나무, 영지(不老草), 천도(天桃), 학, 사슴, 거북이 등을 그려 무병장수와 풍성한 삶을 기원하는 염원이 담긴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그림이다.
조선시대에는 세화(歲畵)라고 하여 새해가 되면 행운과 복을 기원하는 길상화(吉祥畵)를 궁중의 도화서원(圖畵署員)들이 그려 왕에게 진상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중 <십장생도>는 세화의 단골 그림이었는데, 주로 병풍으로 꾸며졌고, 왕은 이를 왕실의 친인척, 고위 대신들에게 하사하였다.
도화서에는 20~30명의 도화서원이 있었는데 새해가 오기 전 그들은 한 사람당 20장,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은 30장의 세화를 그려야 하는 의무가 육전조례(六典條例)에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그린 매년 수백 장의 세화는 수많은 신하들에게 왕이 하사하는 새해 선물로 주어졌는데, 화조(花鳥), 호랑이와 까치 등이 많이 그려졌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이런 그림이 양반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된 이러한 세시(歲時) 전통으로 인해 사람들의 그림에 대한 예술적 시각도 높아지게 되었으며, 오늘날 K-문화를 통해 그 DNA가 전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조는 도화서원 중 우수한 화원을 선발하여 규장각에 소속시켰고 그림을 통한 성리학 이념의 통치를 추구하였다. 풍속 화가로 유명한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부친인 일재(逸齋) 신한평(申漢枰)은 도화서의 유명한 화원이었는데, 언젠가 신한평이 그려온 세화를 본 정조는 그림이 성의 없이 그려졌다고 질책하였다.
그런데 신한평은 전에도 책가도(冊架圖)를 그려오라는 명을 받고 그림을 그려 정조에게 진상했다가 그림에 정성이 실려있지 않았다는 정조의 꾸지람을 받고 1개월간 유배를 간 적이 있었으니, 문예를 사랑했던 정조가 그림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알만하다.
또한 정조는 1800년 새해가 되기 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에게 세화로서 대학(大學)의 팔조목(八條目)을 주제로 한 8폭 병풍을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 지극히 어려운 주제였지만, 단원이 <주부자사의도(朱夫子寫意圖)>라는 제목의 세화 병풍을 그려 진상했고, 이 그림을 본 정조는 크게 만족하였으며, 이를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이 지향하는 성리학의 이상 국가상을 주지시켰다.
여기서 팔조목이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의미한다. 정조가 단원을 총애한 것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재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 정조가 뜻하는 바를 파악하고 이에 맞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소개한 <십장생도>는 10폭 병풍화로서 지난해 11월부터 금년 2월 1일까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뮤지엄 새클러 갤러리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 선보였던 귀한 그림이다. 십장생을 상징하는 자연의 정교한 묘사, 짜임새 있는 구도, 화려한 채색 등으로 조선시대 화원들의 최고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명화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 모두 십장생도에 나오는 자연의 복된 기(氣)를 받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염원해 본다.
joseonkyc@gmail.com
<
최규용 교수 (메릴랜드대 화학생명공학과)>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