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2월 22일(음력 정월 18일) 황제 가경제는 화신의 ‘20가지 죄악’을 발표하고 화신에게 흰 비단 한 필을 하사해 자결을 명령했다. 당시 가경제는 황제가 된 지 4년이 된 시기였으나 건륭제가 태상황(太上皇)으로 존재했기에 실권은 건륭제에게 있었다. 그러나 2월 7일 건륭제가 사망하자 가경제는 건륭제의 총애를 받았던 화신을 제거했다. 하지만 화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부패의 씨앗이었다.
건륭제는 모두 6차례의 남순을 통해 물관리를 중시한다고 선언했다. 치수의 성공이야말로 백성들이 누리는 성세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륭제의 치세 후반기를 자세히 보면 성세 속에 부패의 조짐이 배태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급성장했던 만주인 화신이다. 26세에 건륭제의 호위병으로 총애를 받게 된 화신은 이후 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화신은 만주어·한어·티베트어·몽골어까지 능통한 언어 능력과 특유의 사교성 및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건륭제가 바라는 바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가령 화신은 건륭제가 5번째 남순을 떠난 1780년 의죄은(議罪銀) 제도를 황제에게 건의해 시행했다. 이는 관리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법으로 정해진 감봉 외에 추가 벌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정한 것이다. 취지는 관리들의 범죄를 막기 위함이지만 관리들이 납부한 은이 황제의 개인 금고로 들어가고 그 과정이 공개되지 않는다는 결함이 있었다. 영리한 관리들은 의죄은을 많이 납부할수록 황제의 환심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고 의죄은이 실시되자 작은 실수를 저질러도 일부러 죄를 청하며 황제의 개인 금고를 채우는 ‘공’을 세웠다.
결국 화신이 만들어낸 의죄은 제도는 건륭제의 대신들이 부정을 저지르도록 부추겼고 화신 역시 축재에 성공했다. 남순 직후 건륭제는 화신을 사위로 맞기로 결정했고 의죄은 제도마저 수용했다. 성세 속에 부패가 퍼져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19세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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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헌 / 고려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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