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없던 시절, 어머니의 시계는 자연이었다. 아침은 뒤란의 새가 물어오거나 수탉의 목청이 불러왔다. 해가 서편으로 옮겨가면서 시작되는 처마그림자가 하오를 알렸다. 뜰팡을 내려선 그림자는 시나브로 키를 늘리며 시간을 귀띔해 주다가 저녁 지을 시간을 알리고 돌담 너머로 사라졌다. 쏙독새가 울면 밤이 깊었으니 잠도 깊이 들라는 신호였다.
우리집에 처음으로 생긴 시계는 괘종시계였다. 그 시계가 안방 벽에 걸리고 나서도 어머니는 그림자시계를 더 의지하고 살았다. 내가 처음으로 시계를 향해 기다림을 배운 시각은 저녁 다섯 시였다. 어린이 라디오방송이 시작되는 시각었다. 밖에서 놀다가도 문득 고샅으로 퍼지는 저녁연기의 흐름이나 떼지어 나는 찌르레기를 보고 다섯 시를 가늠했다. 언덕에서 곤두박질치듯 집으로 달려와 놋대야 속의 따뜻한 물에 손 담그고 라디오방송을 듣던 시간, 그때는 날마다의 다섯 시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라는 걸 몰랐었다. 시간이란 무한하고 달콤한 것인 줄만 알았다.
혼자 도시로 나가 학교에 다니면서 나의 시간을 알려 주던 시계는 사발시계라고 부르던 자명종시계였다. 아침마다 난타되는 알람소리에 소스라쳐 일어나면서 시간이란 유한한 것이라는 깨달음이 시작되었다. 산기슭에 피고 지는 싸리꽃이나 칡꽃을 보고 씨앗의 파종시기를 가늠하며 살던 어른들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낮선 시간이 내게 찾아온 것이다. 잠들기 전에 다시 사발시계의 태엽을 감아 밥을 주면서 혼자 경영하기 시작한 시간은 나를 늘 허둥대게 만들었다.
지금 내 방에는 디지털 탁상시계가 나의 일상을 지켜보고 있다. 밤잠에서 자주 깨는 나이가 되면서 쉽게 시간을 확인하려고 바꾼 시계이다. 그 시계에 의지해 잠에 들거나 깬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생기는 제 그림자 속에 스스로 잠기는 밤이 되면 시계의 숫자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새벽의 선잠을 밀쳐내고 눈을 뜨면서 시계를 보면 늘 다섯 시 언저리를 지나고 있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시계의 시침과 분침 사이에 별처럼 반짝이는 초침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두 개의 빛이 쉼없이 들락거리고 있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내 삶에 할당된 시간을 1초씩 퍼내고 있었던 셈이다.
삶의 시간은 가랑비 내리는 시간처럼 소리없이, 삽시간에 지나간다. 젊음의 시간들은 푸른 잎 위에 앉아 응결되는 이슬의 시간이었다. 삶에도 계절이 있어 푸르고 빛나던 나이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잎은 지고 그 위로 서리가 내리는 계절이 찾아온다. 온도가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면 지상의 물체에 서걱이며 얼어붙는 것이 서리이다. 서리의 역할은 무엇일까. 다음 계절을 알리는 이정표같은 것이 아닐까. 희고 몽환적인 결정체의 서리가 가을과 겨울 사이에 솔기를 만들며 흩뿌려지면 지상의 것들은 우선멈춤을 시도한다. 거두어들이고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서리는 혹여 가지 끝에 머뭇거리며 매달려 있는 열매들을 만나면 안으로 스며들어 단맛을 선사하고 사라진다.
사람도 서리의 나이를 사는 때가 온다. 우연하게도 사람의 머리에도 서리를 닮은 흰머리가 생기는 시기이다. 늙어간다는 표식으로 생기는 흰머리가 반가울 리 없지만 살아온 날을 돌아보며 중간 정리를 해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계절마다 부는 바람의 결이 다르고 피는 꽃의 모양새가 다르듯이 나이마다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으리라.
서리의 나이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앞만 바라보고 빠르게 걷던 일상의 보폭을 한 템포 느리게 조절해 보면 좋을 것 같다. 다음 계절을 준비하는 나무처럼 마음의 떨켜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힘에 부치게 무거운 것들을 매달고 있었다면 그것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떨켜가 만들어진 후 수분이 차단된 나뭇잎들은 지난시간 동안 녹색에 가려졌던 색소들을 끌어내어 곱게 물든다. 또한 저녁이 되면 지평선에 가까워진 햇빛이 파장 긴 대기를 통과하며 아름다운 노을을 만드는 걸 목격할 수 있다. 해의 가장자리에 숱한 색들이 스미고 번지면서 주황으로 혹은 붉은 빛만 남아 하늘을 채우는 것이 노을이다. 나뭇잎이나 저녁해는 사위어가며 또 다른 채움을 불러온다. 나이도 그렇다. 비어가는 나이만이 할 수 있는 채움의 역할이 있다. 서리의 나이는 노을처럼 색을 퍼트리며 주위를 곱게 물들일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깨어 스스로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새벽 다섯 시, 서리의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다시 초침의 움직임을 주시해 본다. 한참을 바라보고 있자니 초침의 움직임이 어딘가로 시간을 퍼내는 게 아니라 불쑥거리며 시간을 퍼주러 오는 몸짓이었음을 느낀다. 어떤 사물이든 지긋이, 오래 바라보면 새로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
창밖의 낮은 하늘에는 하현달이 떠 있다. 어제보다 오른쪽 볼살이 조금 더 야위어 그믐으로 가고 있는 모양새이다. 며칠 후 그믐달이 된 달은 보이지 않는 삭이 되었다가 다시 초승달이 되리라. 온달이든 반달이든, 달이 삭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하늘에 달이 살고 있다는 건 큰 위안이다. 서리의 나이는 바로 저 달처럼 어둠에게 살을 내어주고 남은 작은 몸집으로 노랗게, 혹은 하얗게 빛나며 누군가의 위안이 될 수 있는 나이가 아닐까. pinkmd4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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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미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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