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잘 날 없는 국제정세에 기름값이며 음식값까지 가격이 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디 함부로 바람 쐬러 나가기 두려운 시기다. 8,000원 이하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밥집을 찾아주는 ‘거지맵’이 유행한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고물가에도 심신의 안녕을 위해 일만 할 수는 없는 법. 돈 한 푼 쓰지 않는 ‘무지출 여행’ 코스에 눈길이 간다. 서울 종로구 서촌 일대에‘몰라서 못 가는’ 숨은 한옥과 문화공간을 찾았다.
전통·근대 오묘한 조화, 홍건익 가옥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골목길을 걷다 보면 필운동 홍건익 가옥을 마주한다. 1934~1936년 사이에 건립된 근대 한옥이다. 건물을 지은 홍건익은 상인이었다는 사실 외에 자세한 생애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살았던 자택만이 서촌의 골목에 나지막이 방문객을 기다릴 뿐이다.
대문을 열면 740.5m² 부지에 대문채, 행랑채, 사랑채, 안채, 별채 등 건축물 5동과 후원이 길게 이어진다. 도심 한옥은 주로 폐쇄적인 ‘ㅁ’자 형태 평면 구조로 짓지만, 홍건익 가옥은 각 건물을 띄어 지은 덕에 여유가 느껴진다. 모든 건물 내부까지 햇살이 넉넉히 들고 바람도 선선히 통과한다.
전통과 근대가 오묘하게 섞인 건축 양식이다. 자연 지형을 살려 독립된 건축물을 앉힌 전통 한옥의 배치를 따르면서도, 대청 유리문과 처마 차양 등 주거 편의성을 높인 근대 한옥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안채 대청마루 여모판에 새겨진 팔괘 문양 풍혈, 별채 꽃담을 장식한 태극 문양, 이화꽃 문양, 연꽃 문양 등 장식 요소가 곳곳에 남아 눈을 즐겁게 한다. 안쪽 후원으로 가는 길에는 거주 공간과 후원을 구분하는 일각문과 우물이 있다. 후원은 점차 높아지는 구조인데, 단차를 이용해 한쪽에 빙고를 만들었다.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 중 일각문, 우물, 빙고까지 갖춘 유일한 한옥이다.
박제처럼 눈으로만 감상하는 한옥이 아니다. 모든 공간은 방문객이 이용할 수 있거나, 시설관리 인원의 사무동으로 사용된다. 대문채는 관리실, 행랑은 화장실, 사랑은 전시실 겸 체험공간, 안채는 마을 사랑방, 별채는 작은 도서관으로 쓰인다. 사랑채에서 엽서와 채색 도구를 이용해 가옥의 아름다움을 한 점 소장할 수도, 마루에 앉아 장기바둑을 한 판 둘 수도 있다. 안채는 사전 예약을 통해 시간 대관을 할 수 있으며, 별도 행사가 없다면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2011년 서울시 매입 당시에는 오랜 기간 빈집으로 방치돼 흉가에 가까웠다고 한다. 2013년부터 2015년까지 2년 동안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허물어진 집 외벽을 다시 복원하고 목재와 창호, 기와 등 옛 부재에 새것을 더해 2017년 공공 한옥으로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매주 일요일 오후 1시에 영어, 2시와 4시에 무료 한국어 도슨트 투어를 진행한다. 매주 월요일과 설·추석 당일은 휴관이다.
집주인처럼… 한옥·양옥이 얽힌 청전 가옥
서촌 누하동 골목 깊숙한 곳에는 한국 남종화의 새로운 방향을 개척한 작가로 평가받는 청전 이상범의 집과 화실이 있다. 전통 회화에 큰 관심이 없다면 익숙지 않은 이름일 수 있다. 그러나 한때 언론계에 몸담은 그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사건에 휘말린 적이 있다. 바로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의 주요 인물이었던 것. 동아일보 사진부 미술기자로 근무하던 당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 가슴팍의 일장기를 지운 주인공이다. 원본 사진 위에 직접 흰 물감을 덧칠해 지웠다.
이 화백은 이 사건 때문에 40일간 모진 고문을 받고 언론계를 떠나야 했다. 그 영향으로 이후 서촌 자택에 칩거해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고유의 화풍을 완성했다. 그 자택이 현재 이상범 자택과 청전화숙으로 전해지는 이곳이다.
1929년 최초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상범 가옥은 ‘ㄱ’자 안채와 ‘ㅡ’자 행랑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근대 도시 한옥의 구성을 갖췄지만, 도시 한옥에서는 드물게 부엌에 찬마루를 갖고 있다. 이상범은 가족의 생활 공간과 사회적 활동 공간을 구분해 자신은 대청 건넌방을 행랑채와 함께 사랑 공간으로 사용했다. 자신은 행랑채 끝 방을 쓰고, 대문간에 면한 방과 대청에 면한 건넌방을 각각 남녀 손님용 응접실로 사용했다.
한옥 옆에는 1933년에 지은 화실이 맞붙어 있다. ‘청전화숙’이다. 시멘트 벽돌로 지은 8평 남짓한 단층 양옥이다. 가옥과 화실이 회랑으로 연결돼 있어 하나의 건물처럼 이용할 수 있다. 이상범은 이곳에서 문하생을 받아 회화를 교육했는데 배렴, 정용희, 이현옥, 심은택, 장철야, 박노수 등이 이곳에서 배웠다.
홍건익 가옥보다도 덜 알려진 데다 입구도 골목 깊숙이 있어 인적이 드문 편이다. 옛 정취를 오롯이 즐기기 안성맞춤이다. 다소 짙은 빛깔의 목재가 중후한 멋을 뽐낸다. 햇살 좋은 날 안마당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번잡한 서울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다 있나 싶다. 굳은 물감과 오래된 서적, 지구본 따위가 널려 있는 화실은 마치 그 시절 그 시간에 멈춰 있는 듯하다.
가끔씩 전시를 열기도 하지만 별도의 상설 체험 프로그램은 운영하고 있지 않다. 일과 시간 내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홍건익 가옥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공간이 실내까지 개방돼 있다. 월요일과 주말을 제외한 공휴일에는 휴관한다.
청전은 식민지 탄압이 심해지던 1940년대 초부터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해 후대에 친일 인사로 알려지기도 했다. 한때 전국에 배포될 일간지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던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어떤 고뇌를 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한옥과 양옥이 한 건물로 얽힌 이 가옥처럼 복잡한 시절이었으리라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인근 서촌라운지도 가볍게 둘러볼 만하다. 서촌라운지는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작은 전시를 여는 공공 한옥이다. 현재는 제주 도예전이 열리고 있다. 1층 안쪽에는 다례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2층에선 휴식을 취하면서 책 읽기에도 좋다.
인왕산 숲속쉼터, 설경만큼 녹음도 절경
서촌의 골목을 다 둘러봤다면 인왕산으로 향한다. 가파른 산길 계단을 오르다 보면 인왕산 숲속쉼터가 숨겨져 있다.
2018년 인왕산 전면 개방 조치의 일환으로 군 초소 및 경계 시설을 해체할 때 초병 거주 공간이었던 ‘인왕3분초’는 보존하기로 결정됐다. 철근 콘크리트 필로티 구조 위 상부 구조물을 철거하고 도서관으로 재탄생했다. 삼면을 통창으로 올려 주위 경관을 실내로 들였다. 눈 내린 설경으로 유명하지만 녹음이 우거진 시기에도 절경을 이룬다. 진입로와 상부 구조가 투박한 철제 구조로 돼 있어 주위의 자연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인왕산 트레킹을 즐긴 후 자연을 바라보며 쉬거나 숲속에서 책을 탐닉할 수 있는 공간이다.
청운문학도서관도 빼놓을 수 없다. 한옥 외형으로 지어진 구립 도서관이다. 돈의문 뉴타운 지역에서 철거된 한옥 기와 3,000여 장을 재사용해 지붕을 올렸다. 부족한 기와는 숭례문 복원에 사용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구워 올렸다.
본채 한옥은 좌식 열람실과 휴게실로 운영된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곳곳에 눈에 띄고 본채 옆 폭포 소리가 조용히 들린다. 사방이 자연이니 복잡한 생각이 쉬이 사라져 집중하기 좋다. 본채 아래 현대식 건물에 서고와 아동 도서관이 위치한다. 서고에는 작은 중앙정원이 딸려 있는데 어린 대나무로 빙 둘렸다. 인근 주택가에서 멀지 않아 인왕산 시설 가운데 접근하기 쉬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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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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