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시간으로 13일 오후4시에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된 고어후보의 ‘패배 시인 연설’은 ‘역사적’이란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미국의 대통령선거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제43대 대선은 막을 내리는 모습도 과연 ‘미국적’이었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연단에 나온 고어후보는 연설을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를 ‘입으로’ 말해야만 하는 비장한 소회를 억누를수 없는듯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한동안 눈물이 글썽이는가 했으나 일단 말문을 열고 나서는 침착하면서도 엄숙하게 패배 시인 연설을 해나갔다.
연설의 주조는 ‘개인과 정당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며 조국애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었다. 선거가 실시된뒤 5주가 지나도록 대통령 당선자가 확정되지 못한 상황을 들어 세계는 ‘미국이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기자는 그 5주동안의 진행과정에서 “왜 미국이 지금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가”하는 것을 분명히 느낄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고어후보가 연설 서두에서 언급했지만 8분간에 걸친 연설 전부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표현은 ‘판결에 동의하지 않는다.그러나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부분이다.
내용에는 승복할수 없지만 결과는 수용하겠으며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경쟁자 부시후보에게는 ‘자신을 포함해 미국민은 새 대통령을 중심으로 단합할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개인의 감정을 국가적 위기로까지 연결시킬 수는 없다는 선언이다. ‘공’(公)과 ‘사’(私)의 구분-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미국을 있게한 미국민주주의의 ‘대원칙’인 것이다.
5주동안 두 후보가 보여준 것은 ‘법정공방’이었지 ‘인신공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제정한 룰의 틀안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며 그동안 법정공방을 통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5주동안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고비에 달했다고 생각되었을 때 정말로 깨끗하게 시인 연설을 했고 ‘아메리카’라는 이름은 세계사에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는 하나의 나라 이름에 불과하지만 그 단어 자체가 던져주는 어떤 신비가 미국인들 사이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들은 올림픽이든, 행사장이든,파티장이든,연설중이든 어디서든 ‘아메리카’라는 말만 나오면 눈시울이 붉어지고 결연한 조국애로 하나가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이번 선거로 감정의 자극을 많이 받은 흑인계의 시위등을 억지할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부시후보의 ‘달래기’도 고어후보의 ‘호소‘도 아닌 ‘아메리카’라는 이름일 것이다.
고어후보도 패배 시인 연설의 말미에 ‘아메리카에 신의 축복이 있기를.....’(God Bless America)이라고 말했는데 그 말을 하는 순간에 TV카메라의 앵글은 눈물이 차오르는듯한 고어의 눈자위와 티퍼여사 및 리버맨후보등의 결연한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만일 지난 5주동안의 혼란상이 13일의 연설을 계기로 ‘아메리카의 大화합’으로 바뀌어지게 된다면 이보다 더한 드라마도 없을 것이다.선거를 영화처럼 한 것이다.대통합,대화합이란 그것이 국가든 단체든 하나의 커뮤니티이든 하나의 절대 지향명제이다.우리 하와이 한인사회를, 더 나아가 우리 한국인들을, 한국사회를 하나로 결연하게 묶어주는 화두는 없는것인가.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해서 ‘더 큰 것’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 감정은 접어둘수 있는,그리하여 보다 세련되고,함께 진보되어나갈수 있는 그런 화두는 없는지 말이다. 고어후보의 패배시인 연설을 지켜보면서 기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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