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의 반란?
김인영(서울경제 뉴욕특파원)
휴렛패커드사의 경영권 싸움이 화제다. 미국언론들은 창업자의 자손들과 미국 경영계의 여걸 사이의 갈등 스토리를 재미있게 엮어내고 있다.
싸움은 지난 9월에 칼리 피오리나 회장이 컴팩 컴퓨터를 인수하겠다고 전격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불황으로 매출이 줄고, 영업 이익이 감소하는 마당에서 경쟁업체를 인수하겠다는 소식은 주식시장을 발칵 뒤집었다. 주당 25달러 하던 주가는 15달러까지 폭락했지만, 피오리나 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사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공동 창업자의 자손인 휴렛 가문과 패커드 가문이 경영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컴팩과의 합병이 창업 정신과 어긋난다며 내년 3월에 있을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을 거부할 것임을 공식 선언했다. 합병안이 주총을 통과하려면 총주식의 3분의2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두 가문의 지분을 모두 합쳐도 15%를 갓 넘는다.
두 패밀리는 20%의 지지를 더 얻어야 뜻을 성취하고, 피오리나 회장은 67%의 주주를 확보해야 한다. 일단 창업자 후손들이 유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80% 이상의 주주가 어느쪽을 지지할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다.
또다른 스토리를 보자. 미국 2위 자동차 메이커인 포드 자동차에도 최근에 창업자 가문과 전문 경영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창업자 헨리 포드의 증손자인 윌리엄 포드가 최근 전문경영인 사장을 몰아내고 최고경영자(CEO)에 올랐다. 포드 가문은 40%의 표결권을 확보하고 있다. 한국식 경영구조라면 이정도 지분이면 언제라도 경영진을 교체할 수 있지만, 미국에선 그렇게 쉽지 않다. 다른 60%의 주주를 의식해야 한다.
포드 가문은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10여년을 싸웠다. 소액주주 중에서 10% 이상의 지지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포드 일가는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로버트 루빈 시티그룹 회장의 지원을 얻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9.11 테러 후에 인종적 편견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포드 가문은 유태인인 루빈의 지원을 얻어 아랍인의 피가 흐르는 재크 내서 사장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주식시장이 발달하고 이사회 중심의 기업 경영이 정착된 미국에서도 창업자의 후손들이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업들이 많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500대 기업 중 40% 정도에서 창업자 후손들이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소매체인점 월마트는 창업자 샘 월튼의 큰아들인 롭슨 월튼이 회장을 맡고 있고, 1928년 폴 갤빈이 창업한 모토롤라는 현재 손자인 크리스토퍼 갤빈이 CEO를 차지하고 있다.
의류업체인 노스트롬스, 코카콜라에서도 창업자 패밀리가 경영에 간여하고, IBM에서도 창업자 워트슨 가문의 지분은 극히 미미하지만 경영진 인사에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슐츠버거 가문이 88%의 표결권을 장악하고 있다.
한국 대기업의 대부분이 오너 경영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IMF를 맞으면서 한국의 오너 경영체제가 도마 위에 오르고,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경제개혁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한국 재벌 가문들은 미국에도 오너체제가 있지 않느냐며 정부의 개혁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지만 미국의 창업자 가문은 주식시장의 원칙에 따라 지분만큼 권한을 행사하고, 주총과 이사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점에서 한국과 판이하다. 삼성전자에서 이건희 회장의 지분이 10%도 되지 않는데 오너라고 하고, 과거 대우그룹의 자동차판매회사는 100% 사원 주주 회사였지만 김우중 전회장이 자기 회사처럼 경영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 재벌기업의 창업자 또는 그 후손은 오너가 아니다. 그들은 10~20%의 지분을 가진 주주에 불과하다. 작은 지분으로 기업 경영을 전횡하는 구조가 한국 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의 재벌 구조도 시장과 소액주주의 힘에 의해 변화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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