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잠시 휴가를 다녀왔다.
이번 휴가에는 멀리 여행을 가서 새로운 것을 머리에 담는 것조차 피곤해져 그저 좀 쉬고 싶어서 집 속으로 휴가를 갔다.
늘 일정한 시간이면 일어나던 것이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잠자고 싶을 때 잠자고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싶을 때 두 손 탁 놓아 버리고, 모든 평상시 사이클을 통째로 헝클어버렸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향유하며 자신의 삶이 느린 목선을 타고 끝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듯한 기분, 이것도 괜찮았다.
그리고 다소 감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어서 좋았다. 뜨거운 대낮에는 시간을 풀어놓고 펑펑 쓰고 저녁 시간이면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이다.
확실하던 모든 지상의 것들이 지는 햇살에 붉게 물들었다가 점차 윤곽이 무너져 가고 짙은 먹물의 바다로 빠져 들어가면서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다.
5층 베란다에서 내려다보이는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인 동네의 집들 사이로 노랑과 오렌지빛 나트륨 등이 켜지고 저 멀리 상가의 노란 네온사인과 그 앞 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붉은 불빛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보다가 왈칵 서러움을 느끼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그리고 언젠가 그러한 풍경 속을 지나가며 지금과 똑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 같다.아마도 어둠의 장막이 몰려오는 야트막한 산허리를 느릿느릿 올라가는 시외 버스를 타고 가면서였을 것이다.
산그늘 뒷 편으로 붉은 햇살이 안간힘을 다한 듯 찬란한 빛을 발하다 깜박 스러지는가 하는데 산의 품속에 폭 안긴 몇 채의 집들에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검은 어둠 속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를 은은히 피어 올리고 있는 불빛을 보며 불현듯 그리운 사람이 그리워졌던 기억, 아마 나는 친구와 함께 오랜 여행 중이었을 것이다.
낯선 동네의 낯선 길을 지나쳐가며 느꼈던 것이 지금도 고스란히 살아남아 여름의 지는 해를 바라보면 20대의 그날이 가슴 찡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외로움, 쓸쓸함, 슬픔 같은 그런 애잔함이 가슴 한 쪽을 건드리면 모든 것에 갈등도 고통도 미움도 없어진다.
아무리 야속한 사람도, 섭섭한 사람도 다같이 외롭고 불쌍한 인간이라는, 그래서 전부 용서해주고 싶어진다. 인간 존재 근원의 슬픔, 그 바닥을 본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영원불변한 자연 앞에서 우리 삶은 얼마나 덧없고 가여운 것인지, 그러나 그 속에 나란 생명은 미미하지만, 살아있는 것이기에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여름 노을이 아스라한 눈빛만 남기고 곧 사라지고 캄캄한 밤이 몰려오면 베란다 유리문을 열고 환한 불빛이 쏟아지는 거실로 들어갔다. 켜놓은 TV가 왕왕 거리는 소리, 고소한 음식 냄새 등 다시 자잘한 생활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창 밖이 벌겋게 물들기 시작하면 얼른 하던 일을 정리하고 베란다로 달려나갈 수 있었던 짧은 휴가, 비단 나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지.
이번 여름에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라도 짧은 휴가를 다녀오자.
사업 걱정, 돈 걱정, 자녀 걱정을 단 며칠이라도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한인 이민자 대부분이 장편소설 두어 권 쓸 만큼 파란만장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지만 간혹 별로 굴곡 많은 삶을 살아오지 않아 아쉬울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는 사람이 있다.
아무 것도 생각할 것도, 떠올릴 것도 없는 이러한 사람이라면 <바람처럼 물결처럼>의 저자 크리슈 나무르티의 말이라도 기억해 보자.
“침묵 속에 앉아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 깊숙이 투시하는 것 또한 삶의 일부이다.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는가, 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관찰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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