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가끔 묵은 정에 굶주려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또 가족이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외로움을 타는 것은 아닌가 할 때도 있다.
보통 미국에 온 지 몇 년간은 한국에서 오는 손님 뒤치다꺼리 하느라 정신이 없다.일가 친척은 물론 친구에 옛 직장 동료까지 한 팀이 왔다 가면 다른 팀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방문한 동안 관광은 물론 뉴욕 유명 요리도 맛보여주고 돌아갈 때에는 작은 선물이라도 안겨주느라 그들이 돌아간 후
적자 가계부에 감기몸살을 앓을 정도로 파김치가 되기 마련이다.
나 역시 뉴욕에 살면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셀 수 없을 만큼, 자유의 여신상 가는 배도 대여섯 번 이상 타야 했다. 그런데 그 방문의 물결이 10년이 지나자 잠잠해지는 것이 올 사람은 다 왔다갔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맨하탄 32가 책방 앞에서 그야말로 까마득한 시절의 중학 동창을 만난 적이 있다. 70년대초 3년간 다닐 중학교가 ‘뺑뺑이’를 돌려 결정되던 때, 물레 모양의 추첨기 손잡이를 오른쪽 왼쪽으로 한번씩 돌리면 은행알처럼 생긴 추첨알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여기에 쓰인 넘버 ‘7’로 만난 중학 동창이었다. 30년도 지나 맨하탄 한인타운에서 마주친 그녀는 뉴욕에 유학 온 딸과 함께였다.어릴 적 기억에도 70여명의 급우 중 단연 미모가 눈에 띄던 친구였다. 풍문에 의하면 그녀는 기계류를 판매하는 회사의 여사장이라고 했다. 그날 서로 바빠서 그 자리에서 바로 헤어지며 다음날 만날 것을 약속했다.
뉴욕에 사는 동창 2명을 어렵게 연락하여 다음날 점심 시간에 나갔다. 한 친구는 맨하탄 남단에서 물건을 팔다말고, 한 친구는 뉴저지 가게에서 일하다 말고 나와서 30년간의 해후를 잠시나마 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오지 않았다. 못 온다면 아침에 전화하라고 신문사 명함까지 주었건만. 서로 바쁘다보니 1년에 한 두 번 만나기 고작인 우리들은 그녀를 기다리느라 점심도 거른 채 참으로 씁쓸하게 부랴부랴 회사로, 영업 장소로 가야 했다.
주위 친구에게 “전 모나코 왕비처럼 고상하게 생긴 친구를 수십 년만에 만난다”고 자랑했던 나는 “그레이스 켈리는 잘 만나고 왔냐”고 묻는 말에 그냥 “맨하탄 바람이 차더라”고 면목없이 대답해야 했다.
시간이 바로 수익과 연결되는 친구 둘에게도 미안했지만 나는 왜 그녀가 당연히 우리들을 보고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 했는 지를 돌아보아야 했다. 별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도 많은 법이다.
이처럼 뉴욕 사는 우리들은 한국에서 알던 사람이 뉴욕에 온다면 일단 반갑다. 그리고 당연히 한 번 만나 식사라도 하려 한다. 또 우리가 바쁘다고 하면 그들이 섭섭해 할 것으로 짐작한다. 하지만 냉정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때로 그들이 우리를 귀찮아 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한번 얼굴을 보았으니 됐고 이제 시간만 나면 다이아몬드고 골프채고 기타 명품들을 바리바리 사가고 싶은데 뉴욕 친구는 눈치도 없이 자꾸 “오늘은 뭐해? 어디 갈래?” 하고 매일 끼어 들려한다면 부담스러워질 수 있다. 또 어디든지 꼭 붙어서 같이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고도 생각하지 말자.
전철과 버스 지도 보는 법 및 타는 방법 가르쳐 주기, 메트 뮤지엄 또는 서클라인 배 타는 곳까지 데려다 주기, 브로드웨이 뮤지컬 끝난 시간에 데리러 가는 방법 등을 실천해 보자.
한국 가는 공항에서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오면 꼭 연락해”하지만 막상 우리가 한국을 방문할 때에는 바빠서 전화 못하기도 하지만 ‘네가 뉴욕 와서 진 신세 갚아’ 하는 것 같아 일부러 연락 안하고 오기도 한다.
아무리 미국에 오래 살아도 옛친구가 좋다는 그리움 하나로, 타국에 사니까 나는 외로운 거야 하는 일종의 감상 하나로, 엄벙덤벙 행동하다가 나중에야 “다들 왜 내 맘 같지 않지?” 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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