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도는 동서고금을 통해 빼어놓을 수 없는 인류역사의 한 부분이다.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고대 유대인들은 400여년 간 이집트의 노예였다. 고대 희랍 사회구조에서 노예제도는 중요한 사회 구조의 일부였다. 이솝의 우화로 유명한 이솝도 기원전 6세기 노예로부터 해방된 자라고 한다. 로마 시대 시실리에서 탈출한 노예 스파르타쿠스는 4만 명의 노예 군대를 구성하여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용맹히 싸우다가 마지막 1인까지 처절한 최후를 마친다.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에는 빈곤한 자유민보다 부유한 노예들도 있었다. 드문 경우지만 노예가 돈을 들여 정부 고급 관리가 되기도 했다. 중세 비잔틴 제국에서는 노예들이 교회의 잡무를 보기도 했으며 십자군 전쟁 때 교회의 기관에서 모슬렘을 노예로 부린 적도 있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에는 오랜 전통의 노예원이 있어서 조직적으로 인디안 노예를 멕시코 수도에서 매매했었다. 짐승보다도 못하게 쇠사슬에 줄줄이 묶여 혹독한 항해 후에 살아남은 흑인 노예들은 무쇠처럼 강건하고 면역이 잘되어있어 인기 품목이요 중요 재산목록이었다. 1850년경 건장한 젊은 노예의 값은 500달러 선이었다.
미국의 노예 역사는 1619년 신대륙에 최초로 20여명의 흑인 노예들이 버지니아주의 제임스 타운에 팔려오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807년 영국은 노예 판매를 불법화시켰다. 1833년 필라델피아에서 반노예 조직이 결성되고 1840년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고 불리는 지하조직이 형성되어 남부에서 탈출해 오는 노예들을 구해주기 시작하였다. 소설 ‘Uncle Tom’s Cabin’은 민중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어 링컨 대통령 1863년 마침내 노예 해방 포고를 하게된다.
우리나라의 노예 역사는 어떠했을까. 신라가 한반도 삼국을 통일할 즈음 수도 경주에 8,000여명의 노예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30%는 계승 노예였는데 아버지가 양반이더라도 어머니가 노예이면 그 자식도 노예 신분에서 벗어 날수가 없었다. 고려조에 와서 노예 인구는 쿠데타, 전쟁 포로들로 인해 급증했다. 조선 왕조에 이르러서 인구의 40~50%가 노예였다는 연구가 나온다. 심지어 빚을 못 갚으면 끌려가 노예가 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형태는 다르나 인신매매는 아직도 벌어지고 잇다. 사우디 아라비아와 앙골라는 1960년대에서야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1980년을 전후로 인도와 그 주변 국가에서는 5,000만 명의 어린이들이 팔려나갔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아직도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소위 아라비안 카펫을 짜느라 그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바늘에 찔려도 아픈 기색도 낼 수 없으리라. 어린이 노동력으로 짠 이런 카펫을 비롯한 모든 상품의 불매 운동에 참여해서라도 현대판 노예제는 근절해야 한다고 본다.
김지혜/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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