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 또 사회가 종교에 미치는 영향도 있다. 종교와 사회 중 어느 것이 먼저일까. 종교든 사회든 인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지구엔 많은 동식물들의 세계가 있다. 그걸 사회라고 하지는 않는다.
종교는 동식물들의 세계에선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이 사는 사회 안에서만 종교란 말은 사용된다. 종교의 발생기원은 샤머니즘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기복과 치유에 기인한다. 선사시대 즉, 인간 역사가 기록되기 전 시대의 인간이란 한갓 동물보다 조금 나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마음과 육체로부터 받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하늘에 빌기 시작했다.
여기, ‘비는 것’에는 인간 한계의 슬픔이 담겨져 있다. 원시종교나 현대 고등종교나 이 ‘빔’ 즉, ‘구함’의 근간은 변함이 없다. 인간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를 하늘을 우러러 빌어보며 하늘의 힘을 빌려 벗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늘에 빈다고 병이 고쳐지는 것은 아니었다. 병을 하늘에 빌어주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역할의 중재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의식이 필요했다. 그 중재자와 의식이 발달돼 고등종교로 이어졌다.
사회는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관계란 두 사람이 있어도 성립된다. 가정은 사회의 최소 단위다. 가족끼리도 사회성을 유지해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 병이 나면 치료도 하는 한편, 온 가족이 병 낫기를 간구 해야 한다. 병 낫기를 간구 하는 그 자체를 종교적 의식 행위라 할 수는 없지만 종교성은 내포돼 있다.
사회든 종교든 무엇이 먼저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사회와 종교는 떨어질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로 영원에의 희구를 갈망한다. 사회는 현재성을 내포한 인간 삶의 현장이다.
현재성과 영원성이 서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재와 영원은 서로 양분된 것이 아니라 숲과 나무와 같은 관계를 맺는다.
포괄적 내용을 담고 있는 종교를 숲이라 하면 개개인의 삶의 현장이 펼쳐지는 사회는 나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그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삶의 사회를 숲이라 한다면 종교성을 가진 개개인을 나무로 볼 수도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나무만 보인다. 멀리서 보면 숲만 보인다. 그러나 나무와 숲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종교가 타락하면 사회도 타락하게 된다. 사회가 타락돼도 종교만은 그렇지 않아야 한다. 정의와 공평과 인권이 살아있는 사회가 되려면 종교가 바로 서야만 한다.
종교가 바로 서려면 종교 지도자들이 올바로 교육을 받고 배출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종교의 순기능이 종교지도자들의 무식과 무례로 인해 그 역할을 상실하고 오히려 사회의 지탄을 받게 된다.
종교 지도자들은 사회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해주고 그들을 바른길로 인도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그만큼 흠 없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종교는 인간과 인간 집단인 사회를 변화시키는 기능도 갖고 있다. 그 변화의 중심이 순기능으로 작용할 때 사회는 평화로워진다.
그러나 그 기능이 역기능으로 작용할 때 인간과 사회를 배타주의와 집단이기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모순을 낳게 할 수도 있다. 사회를 쫓아가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가 인간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종교인들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김명욱/목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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