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희/소설가
예나 지금이나 선진 문물에 대해서는 막연한 동경 비슷한 감정이 있다. 흔히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이 외국 유학을 다녀온 지성을 갖춘 자로 묘사되거나 연예인들이 토크쇼에 출연해서 미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말하면 미국이나 유럽은 마치 문명의 메카나 되는 것처럼 선망으로 여겨지게 된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은, 물론 미국 안에 형성된 한인사회를 지칭하는 말이지만 로스앤젤레스는 문화의 메카도 아니었고 문명 발생지도 아니었다.
드라마에 수도 없이 등장하던 LA, 툭하면 미국 순회공연 갔다왔다고 자랑하던 장소인 로스앤젤레스에 형성된 코리아타운은 영세하고 조잡했다. 신문을 봐도 라디오를 들어도 그 분위기는 영락없이 60년대 유행했던 CM송처럼 촌스러웠다. 광고 디자인도, 즐비하게 번쩍이는 한글 간판도 몇몇을 빼놓고는 변두리 골목쟁이에 자리 잡은 인쇄소 건물처럼 조악했다.
그리 세련되어 보이지 않은 사람들이 끼리끼리 단체라고 무리를 지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젠 한국에서조차 유물 취급하는 낡은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그게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인지도 알지 못했다. 부러움으로 바라보던 미국은 단지 외국이라는 환상 속에 자리잡은 겉멋에 불과했다. 미국이라는 국적만 서양일 뿐이지 그 안에 자리 잡은 한인사회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조선시대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실망을 금치 못하던 내 자신이 이 미주 한인사회에 서서히 적응이 된다는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동화되어서 촌스러워지고 유행에 둔감해져 갔다. 내 의식은 내가 한국을 떠날 당시로 굳어져 있었고 더 이상의 습득은 없었다. 남의 문물이라면 기를 쓰고 관심을 가졌던 지난날과는 달리 미국에 살면서도 정작 미국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정보를 얻는데는 느렸다.
영어 탓이라고, 한국에 머리를 향하고 있는 내 영어실력은 죽었다 깨어나도 미 주류에 들어가긴 힘들다고 변명하며 한국을 잊어가고 나 자신을 잃어갔다. 공감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고는 주말이면 들르는 집 근처 비디오 가게가 고작이다. 책방을 들르는 일은 점차 뜸해지고 연극이나 음악 연주회를 내 돈 내고 가는 일은 없다. 문화생활을 누리는데 점점 인색해져 가고 나는 어느덧 오로지 먹기 위해 올림픽가에 있는 고기구이 음식점 앞에서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지식의 문화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지적 사치이긴 하지만 문화 강좌에 사람들이 몰리고 평생교육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날로 고급화하는 입맛을 위해 음식문화는 점점 전문화하고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은 어디서 그런 다양함을 습득하는지 빠른 두뇌회전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책방에 쌓여 있는 지식의 양은 엄청나서 바라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이다. 고국 방문 때 선물로 나눠주던 미제 초컬릿에 시큰둥할 정도로 수입품은 지천으로 널려 있다. 예전에는 쉽게 가볼 수 없어 상상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던 LA도 좀 산다하는 사람은 한 번씩 들러갔다. 고국에 돌아가서는 이젠 반대로 LA에 사는 사람을 우습게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밥만 먹고사는 일이 당장은 우선인 것 같지만 현금화되지 않은 창조적 고뇌가 없이는 어떤 사회도 발전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변화가 무조건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빠르게 변하는 바깥 세상과 동떨어진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낙후된다면 이 또한 문제인 것이다.
이 땅에 발을 내딛었던 이민 1세는 백년 전에도 있어 왔고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들 또한 처음에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선 엘리스처럼 촌스러움에 당황하며 뒤떨어짐에 실망할 것이지만 내가 그러했듯이 잘 순응해 갈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있다면 정체되기 전에, 이 이상한 나라의 시민이 되기 전에 스스로 빠져드는 타성을 박차고 나섰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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