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호중
일리노이주 노스브룩
한국 문교행정의 대표적인 난맥상을 들라 하면 일관성 없이 변화무쌍하였던 대학 입학전형 방식과 초중고생의 한자교육을 들 수 있겠다. 말도 많았던 한자교육은 실시하였다 중단하는 것을 반복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나의 중고교 시절에는 한문시간이 있었다.
그때 배운 한시 한 구절은 40여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내 귓가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7세 나이에 한국에서 초등학교도 들어가 보지 못하고 이민을 와서 이제 서른이 넘은 큰 아이는 겨우겨우 한글 읽는 법을 깨우쳤다. 한국식당 메뉴에서 ‘산낙지’가 있는 것을 보고 산에서 나는 낙지도 있느냐는 질문을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아들의 동갑내기 친구 하나는 미국에서 태어났는데도 한국말을 우리 애보다 훨씬 잘한다. 어느 무더웠던 여름날 우리 집에서 뜨거운 찌개냄비를 가운데 놓고 땀을 흘리며 식사를 하는 도중 그의 입에 서 ‘이열치열’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내가 잘못 들었나하고 다시 한번 물어보니 분명히 그 단어를 말한 것이었다.
부모가 모두 한국인이고 그 아들도 순수 한국인인데 한국인이 조금 어려운 한국 단어를 구사한다고 해서 무슨 놀랄 일이 있겠느냐 하겠지만 그 아이가 미국 땅에서 태어나 미국에서만 30여 년을 살아온 것을 감안하면 놀랄 만하다.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떻게 이 어려운 단어를 배우게 되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아들 친구의 대답인 즉 부모님이 영어가 유창하지 못해서 자식인 그와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 대안으로 자신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였다 한다.
아들 친구에게는 뚜렷한 목적과 절실한 필요가 있었고 남다른 노력에 대한 당연한 귀결로 그의 한국어 실력은 또래의 수준을 훨씬 넘게 되었다 한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면 한국어가 서툰 자식들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부모들도 마음 다부지게 먹고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여 자식과 최소한의 의사소통만이라도 원활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흔히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 하였다. 타산지석이라 하였듯이 젊은 아들의 친구에서까지 분명히 배울 점이 있다. 이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아있으면 누구든지 지나간 한해를 돌이켜 보게 된다. 마음속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으면서도 생각 없이 뱉어낸 말 한마디가 왕왕 상대방을 상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자주 범하는 나의 나쁜 버릇이다. 좀더 상대를 배려하며 말하 는 좋은 버릇을 길러보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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