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라는 세월이 또 지나갔다. 내 작은 몸 하나를 받혀주기 위해 8만리 광활한 땅덩이 지구와 태양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또다시 돌아가고 있다. 이와 같이 유한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무한한 우주가 유한의 인간을 감싸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때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회갑을 넘으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생과 사는 영원한 원수가 아닐 수 없다. 산 사람 치고 죽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생사를 초월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살아도 죽기 위해서 산다고 한다. 죽기 위해서 산다는 말은 결사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결사적으로 산다는 말은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산다는 뜻이다. 그저 목숨이 붙어있으니 마지못해 사는 것이 아니라 뜻 있는 일을 찾아서 그일 때문에 죽지 못하고 또 죽을 시간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꼭 경청해야 할 말이 있다. 즉 슈바이처 박사는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노르웨이 오슬로를 방문했을 때 세계를 향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상황에 과감히 직면하기 위하여 인간은 초인이 되었다. 그러나 초인의 힘을 갖게 된 이 초인은 이성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의 힘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더욱 더 가련해졌다. 인간은 초인이 될수록 자신이 더욱 비인간적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양심을 일깨워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상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와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이라는 저서 속에 담겨진 제일철학 즉 신학과 관련지어 진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신은 우리 인간에게 ‘무한한 생산’ ‘절대적 자유’ ‘무제한 행복’ 등 3가지의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한한 생산’은 경제적으로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켰고 생태학적 위기와 핵전쟁의 위험으로 지구를 황폐화해 종말을 재촉하게 되었다.
‘절대적 자유’는 정치권력, 금권력, 정보력 등의 소유자에 의해 종속되어 노예가 되거나 위선자가 되어 아부하지 않으면 소외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무제한 행복’은 쾌락주의에 빠져들고 독차지하려는 소수에 의해 대다수는 불행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와 같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끝없는 멸시, 투쟁, 범죄는 우리 모두가 함께 파멸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두고 사악한 인간들이 저지른 신의 위대한 약속의 3대 실패이라고 했다. 또한 사회 심리학자들은 신의 위대한 약속의 실패는 극단적인 쾌락주의로 사회가 타락하고, 자기 중심주의와 이기주의로 인한 돈, 명예, 권력에 대한 탐욕은 자유 민주주의 체제의 기능을 상실케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암담한 파국의 근원이 소유에 대한 탐욕의 소유 양식에서 비롯된 것임을 인식하고 속죄하여 창조하는 기쁨을 나누며 함께 사는 존재 양식으로 일대 전환하는 결단이 필요할 때라고 본다.
박종식/예비역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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