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주/국문학자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지통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슬픔이 크다는 절망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나 어머니의 죽음은 가슴을 에이는 듯한 아픔이요 그리움과 안타까움이다.
나는 꽃을 보면 아이들 외할머니가 등식처럼 생각이 난다. 할머니는 지주 정성으로 정원을 가꾸시는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손끝 닿는 나무마다 푸르고 어루만져 주는 꽃들은 서로 겨루기라도 하듯 활짝 피었다. 참 신기할 정도다. 소노마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과 이웃사람들의 눈길을 우리 정원에 멈추게 했다.
아침마다 신문을 샅샅이 보시고 한국 정치판에 참견도 하신다. 한밤중에도 할머니 방에는 불이 켜져 있고 거기에는 향수를 달래듯 뜨개질을 하시거나 조용히 성경을 읽고 계시는 할머니의 미소가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사시던 할머니가 10일 동안 입원하시고 퇴원 후 33일만에 거짓말처럼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허탈과 애통으로 아내는 실신 상태가 되었다. 어머님의 마지막 한마디 “나는 간다, 고맙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의식을 잃으신 지 하루만에 눈을 한번 크게 뜨시더니 입술을 내미셨다. 아내의 마지막 입맞춤을 끝으로 어머니은 영원한 저 천국으로 떠나신 것이다. 참으로 곱게 사시다가 곱게 가셨다.
59년을 통해 필생 불후의 걸작 ‘파우스트’를 쓴 세계적 문호 괴테는 임종시 “더 많은 빛을...”이라고 했다. 선천부사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 난에 항복한 것을 부끄러워해 평생 팔도강산을 유람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은 “저 촛불을 꺼다오”라도 주문을 했다. 10자도 안 되는 시구다. 전자는 죽음이 엄습해 오는 답답한 심정을 탈피하고 싶은, 자연 섭리에 대한 반항이거나 도전이라면, 후자는 동양 철학이 그렇듯 자연에 대한 순리와 순응을 의미한다.
대개 마지막 한마디는 부탁이나 소원을 말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 “고맙다”라는 말이 왜 이렇게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극심한 병고 중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으며 가실 때까지 남을 배려하는 말씀을 하시다니 사실 부끄러움과 자책이 앞선다.
말벗도 없으신 어머니을 홀로 두고 골프의 유혹에 빠져 늦게 귀가한 적이 몇 번이었던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도 공이 보이나”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시던 어머니이 금방이라도 어디서 나오실 것만 같은 환상이 떠오른다.
출근길 자동차가 길모퉁이를 돌아갈 때까지 멀리서 쳐다보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 밤늦도록 정원에서 서성거리거나 창가에 서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던 그 고마우신 어머니이 지금 어디 계신다 는 말인가. 어머니은 생전에 우리를 그렇게 그리워만 하셨는데 우리는 사후에야 어머니을 그리워하고 있다.
어머니의 유언은 “고맙다”, 그리고 커다란 유산은 꽃과 같은””미소” 바로 그것이었다. 구석구석 어머니의 빈자리를 보면서 내가 남겨야 할 말은 무엇이며, 나는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니 새삼 남은 삶이 숙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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