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목사(부르클린제일교회)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끈질긴 의문이 생기게 만들었다. 왜 예수가 저렇게 처절하게 고난을 당해야 했는가?라는 의문이다. 멜 깁슨은 적어도 미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질문을 강력하게 던지게 만들었다.
지난 4월12일자 ‘타임(Time)’ 잡지는 왜 예수는 죽어야만 했는가?(Why did Jesus have to die?)를 특집 기사로 다루었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3천만 명 이상이 관람하면서 일으킨 여파와 또한 재의 수요일에서 고난주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강력하게 대두된 그리스도의 수난의 문제를 터치하기 위함이었다.
’타임’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세 가지 견지에서 설명했다. 첫째, 그리스도의 성육신·수난·죽음으로 사탄의 권세를 깨트린 것(닛사의 그레고리). 둘째, 그리스도의 수난이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었다는 견해(캔트베리의 안셈). 셋째, 그리스도의 수난은 우리가 따라야 할 완전한 사랑의 모범이라는 견해(피터 아벨라드)를 인용했다.
이 세 가지 견해 중에 멜 깁슨의 영화는 두 번째 견해인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을 가장 강력하게 묘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사실 전통적으로 이 두 번째 견해가 가장 중요한 견해요,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이사야53:5-6; 마가복음20:28).
나는 목사로서 또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화를 관람하면서 아내와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그렇게 처절하게 고난을 당한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느낀 감정은 적어도 위의 둘 째 견해가 가장 강력하게 와 닿은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수난 하면 자동적으로 두 번째의 전통적인 견해로 보아온 것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세 번째 견해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한 성경 구절이 있다. 바로 누가복음 9장23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는 말씀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수가 십자가를 지기 훨씬 이전에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칠 때 사용한 말씀이다. 이 의미는 내가 나에게 맡겨준 십자가를 지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대속적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국한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 힘든 십자가를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성실히 지신 모범은 바로 믿는 자가 따라야 할 중요한 제자도의 모범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수는 더 극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말했다(마태복음10:38).
오늘 날 미국인들의 통계에 따르면 98%가 하나님의 존재는 믿으나 단 33%밖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65%의 사람들이 하나님은 좋은데 십자가는 지기 싫다는 말과 같다.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하는 부담(십자가)은 싫다는 말이다. 과연 이들에게 구원이 있을까 의문스럽다. 멜 깁슨의 영화는 보는 사람들로 하
여금 이 문제를 다시 심각하게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 십자가는 감상만 할 대상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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