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용을 아는가. 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에는 방외(方外)의 하이에나 같은 존재였고 광주학살이 나자 백악관 앞서 86일간 1인 시위로 전두환 무리의 포악성을 세계에 타전한 투사.
워싱턴에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전위에 섰던 정기용(65)이 돌아왔다.
과거사를 둘러싼 격랑이 신생하는 조국의 양심을 저울질하는 가운데 그는 긴 잠행을 끝내고 소설가란 예상치 않은 타이틀로 2000년대로 회귀했다.
‘그때 그 사람들’(학영사 간). 70년대가 토해낸 폭력의 과거사를 사실적으로 재구성한 실화 소설이다.
“나의 투쟁 일생이 가공의 역사속을 헤매다 끝난 게 아니라 진짜 역사속에 뛰어들어 뭘 했나를 확인하고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가 헌신에 대한 자기 점검의 유혹과 과거사 정리에 대한 책무감으로 썼다는 ‘그때 그 사람들’은 모두 4부로 당대의 절대적 전율을 그려냈다.
박정희 핵무기 개발사건, 10.26 박정희 저격 사건, 12.12 전두환 군사쿠데타, 5.18 광주민주항쟁.
창의의 힘에 의지하지 않은 글들은 현대사의 피튀기는 현장에 있는 듯한 생생함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특히 중요한 사건마다 미국의 심장부로 타전됐던 국립문서보관소의 비밀문서들을 키손(대표 이흥환)의 도움으로 곁들여 사실성을 더 높이고 있다.
“미 행정부 비밀 문서함의 1차 기록들은 한반도에 얽힌 미국의 국익이라는 함수가 어떻게 산출되고 어떤 수확을 이끌어냈는지 전 과정을 속속들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파란의 현대사는 정기용 그 자신의 개인사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나고 중동고, 동국대 정외과를 다닌 그는 6.3 사태를 주동하며 반독재의 대열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그는 이종격투기의 전사들처럼 주먹을 휘둘렀고 이성의 에너지를 쏟아냈다. 1965년 불가피하게 미국행을 선택한 그는 신체적 자유를 얻은 대신 “정의로운 말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미주 반독재 운동의 전위에 서게 됐다.
“그 시절 내 일생의 방향은 어쩌면 운명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공권력에 대한 반발이나 개인적인 포한보다 부글부글 끓는 정의감이 나를 그냥 있지 못하게 했습니다.”
1970년 워싱턴에서 한민신보를 창간하며 박 정권의 인권탄압의 실상을 알리고 김대중씨, 김재준 목사등이 창설한 한민통 홍보위원장, 1978년 한국민주회의 의장을 맡아 해외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국내 가족들의 박해는 어쩌면 투사의 길에 피할 수 없는 아픈 훈장 같은 것이었다.
“지금 경제개발의 공을 들어 박 정권을 찬양하는 이들이 있지만 인권을 짓밟고 독재를 하고 민주적인 헌법을 말살해야만 경제발전이 된다는 주장은 소아병적 논리일 뿐입니다.”
정기용의 이름이 명성을 얻게된 건 광주의 만행이 있고서부터였다. 그는 백악관 앞에서 86일간 단독시위에 돌입했고 AP, UPI 같은 유수의 언론들이 그의 고발에 귀를 귀울였다.
“지나온 나의 역정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남모르는 긍지를 안고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나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좀처럼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진정한 정의의 투쟁, 그 진한 맛을 직접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실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80년대 중반 그는 16년만에 귀국했다. 민정단 윤길중 대표의 정치특보를 맡아서다. 단선적 시각으로 재단하면 훼절의 불순한 기록은 그의 90년대를 안식년으로 만들었다.
1991년 한국서민연합회를 창설했다. 서민을 대변한다는 취지다. 95년에는 서울시장에 입후보했다. 물론 실패였다.
“비록 남들에는 오늘의 내가 초라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난 나의 길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자긍하는 그의 정신은 예토(더러운 땅)를 정토로 바꾸겠다는 옛날의 다짐처럼 아직 서슬 시퍼렇다. 이 60대 청년의 길은 그래서 ‘그때 그 시절’을 넘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이종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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