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실학자로 유명하다.
1780년 삼종형 박명원이 청 고종 70세 진하사절로 북경에 갈 때 수행해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했고 그 후 ‘열하일기’라는 불세출의 견문록을 남긴다.
연암을 일부 비평가들은 중국의 소동파, 영국의 셰익스피어 등과 비교한다. 조선조 이후 연암만한 문장가, 문호가 없다는 얘기다.
“그의 문장은 천마가 하늘을 나는 것 같아 굴레를 씌우지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법도에 다 들어맞는다. 그의 문장은 문장 가운데 으뜸이라 할 만하다.” 구한말 김윤식 선생이 박지원의 문장에 대해 한 평이다.
그는 명문거족 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가난하게 지내왔다. 벼슬에 뜻이 없어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했던 탓이다.
인생의 말년, 그러니까 쉰 안팎의 나이에 연암은 음사로 말직의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제자문인들의 적극적 추천도 있었지만 아마도 가난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였을 것이다.
그가 외직인 안의현감에 나갔을 때다. 평생 가난 속에 지내온 그이니 만치 여생을 위해 뭔가 마련에 나서지 않을까 하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예상이 빗나갔다. 경치가 빼어난 안의로 연암은 친구 문인들을 잇달아 초청했다. 그리고는 함께 풍류를 즐겼을 뿐이다.
“박지원은 평생 조그만 집 한 채도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이제 늘그막에 고을 수령으로 나갔으니 땅이나 집을 구하는데 급급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초연히 천리 밖의 글 친구들만 초대하고 있다니… 문인의 행실이 이처럼 속되지 않기도 어려운 일이다.”
당시 임금 정조의 찬탄이다. 정조는 그러던 어느 날 박제가를 일부러 불렀다.
박제가 역시 연암의 문하다. 그런 그가 공무에 바빠 안의에 가 문우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못함을 안쓰럽게 여겨 특별 휴가를 준 것이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고 할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연암 이야기가 길어졌다. 다른 게 아니다. 고위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실태에 대한 특별감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한국 발 보도가 눈에 띄어서다.
남이 하면 투기, 내가 하면 투자라고 했던가. 그 특별감사라는 게 벌써부터 지겹게 느껴진다. 결과야 뻔할 테니 말이다.돈에 흔들림이 없는 공직자. 그건 조선조 때나 가능한 얘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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