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일 때 50대를 바라보는 시각은 멀게만 느껴졌다. 20대와 50대 사이는 아직 시간적인 거리가 있기에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거나 바라볼 필요가 없었다. 구태여 20대의 시간이 주는 압박감과 긴장감도 많은데 몇십년 뒤의 미래 시간의 책을 열어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아직 40대 중반에 서 있다. 그러나 이미 50대를 바라보고 있고 50대를 준비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포기하거나 기가 죽으면 안되지만 나이가 들어도 오기나 혈기를 품는다면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 된다.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50의 나이를 지천명이라고 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늘의 뜻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 말은 50대에는 세상 사는 도리를 깨닫는 나이라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세상을 떠나가는 사람은 없다. 지천명의 나이 50이라고 해서 세상을 다 알리는 없다. 그러나 지나간 다른 세대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도를 어느 정도는 터득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즘은 세대를 표현하는 말들이 다양하다. 10대나 20대를 신세대라고 하고, 30대 40대를 낀 세대라, 50대 이상을 쉰 세대라고 한다. 신세대와 낀 세대와 쉰 세대가 노래방에 같이 가면 신세대는 노래방에서 랩이 나오면 거침없이 몸을 흔들며 흥겹게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낀 세대는 안다고 하면서 따라하지만 오히려 어색하기만 하다. 그런데 더 처량한 것은 쉰 세대다. 랩이 나오면 화를 낸다. 그것이 무슨 음악이냐 하면서 못마땅하게 여긴다.
50대는 10대가 고민하는 것처럼 중간인으로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간에 위치해 있다. 아들이 아니지만 아들이어야 할 때가 있고 학생이 아니지만 학생이어야 할 때가 있다. 사랑을 하지만 사랑을 받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50대는 또 다른 인생의 사춘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앞으로 달려가기 두려운 시간에 서있다. 
그 서있는 자리가 안전한 자리가 될 수도 있고 아직 불안한 자리가 될 수 있다. 어떤 자리이든지 안심할 수 없고 불안할 필요가 없다. 만일 50대에 여러 가지 삶의 영역에서 성취를 누리고 있다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머리를 숙여서는 안 된다.
‘남자 나이 50’이라는 책을 쓴 호저 라이너스는 지금까지 살아온 50대의 나이를 통해 얻어진 통찰력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비전을 세우라고 했다. 
 아무래도 50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막바지 정상을 향하여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등산객의 심정이라고 할 것이다.
김범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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