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9월26일 하와이에서 열린 정범진씨와 이수영 아이콜스 대표와의 결혼식 사진
성공한 사람들 뒤에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헌신한 부모가 있다. 올 한해 한인 사회에서는 법조계, 정치계, 경제계 등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인들이 어느 해보다 많았다. 그들의 성공 스토리 뒤에 알려지지 않은 부모들의 입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의 중요성과 그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이에 본보는 장애를 딛고 최근 맨하탄 형사 법원 판사로 지명된 알렉스 정(한국명 정범진) 판사를 시작으로 한인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의 부모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시리즈로 엮어본다<편집자 주>
“며칠전 판사복을 입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 맨하탄 법원을 찾았습니다. 저를 발견한 아들이 판사석 뒤에 마련된 의자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판사석 뒤에 앞아 재판을 진행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힘들었던 지난 30년간의 이민 생활이 제 머릿속에서 영화와 같이 지나갔습니다.”
67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서 태어난 정범진 판사는 76년 당시 9세의 나이로 가족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이민 당시 1인 200달러로 제한된 외화 유출 방지법에 따라 정 판사의 가족은 800달러의 돈을 가지고 이민을 왔다. 당시 플러싱 2 베드룸 한 달 렌트비는 250달러. 아파트 렌트비를 지불한 후 정씨 가족 수중에 남은 돈은 고작 200 달러였다. 이에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이민 전까지 한국 신문발행부수공사의 사무국장으로 역임한 정판사의 아버지 정규동씨는 택시 운전자로 어머니 이명자씨는 맨하탄 봉제 공장으로 그들의 고된 이민 생활은 시작됐다.
정규동씨는 “이민 온지 6개월 만에 범진이가 P.S 120에서 반장으로 선출됐다”며 “힘들고 어려운 시기였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매일 매일 운전대를 잡았다”고 당시 생활을 설명했다.하지만 택시 일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뉴욕 지리에 밝지 못했기 때문에 손님들로부터 불평을 듣기 일쑤였으며 결국 뉴욕 시경의 함정수사에까지 걸려 택시 일을 그만두게 되는 상황에 까지 이른 것이다.결국 2년 뒤 1978년 정씨 가족은 한인들에게 더 좋은 기회가 있다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부 이주를 결심하게 된다.
가족들과 함께 서부 샌프란시스코 우드 중학교로 전학한 정 판사는 이때부터 가족들을 돕는다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지역 골프 연습장에서 청소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은 정 판사는 매일 학교를 마치고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청소 후 연습장에서 남 몰래 골프연습을 하던 정 판사를 유심히 본 한 프로 코치는 정씨 부모들에게 정씨를 프로 선수로 키우자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정 판사의 어머니 이명자씨는 “당시에는 생활이 힘들었기 때문에 범진이를 운동선수로 키우려는 생각조차 못해보았다”며 “만약 그때부터 골프를 시켰으면 누가 아느냐? 우리 범진이가 타이거 우즈같은 골프선수가 되었을 줄을”이라고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지었다.
정 판사는 골프뿐만 아니라 배구에도 소질이 있었다. 우드 중학교 재학 당시 교내 배구 경기에서 최우수 선수로 선출되기도 했으며 정판사의 이름과 상패는 아직도 우드 중학교내에 전시되어 있다.1983년 5년간의 샌프란시스코 생활에서 어느 정도 돈을 모은 정씨 가족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서부보다는 동부가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하지만, 뉴욕의 살인적인 물가는 역시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에 이주 몇 달 만에 다시 어머니 이명자씨는 맨하탄으로 재봉일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명자씨는 “일에 치어서 한 번도 아이들 숙제 한번 봐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식 교육 잘 시키셨네요’하고 인사말을 해올 때마다 언제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며 “숙제를 해가지 못해 울고 있던 큰 딸을 보며 영어가 부족해 도와주지 못하는 한심한 내가 실망스러워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말했다.뉴욕 이주 2년만인 1984년 정 판사는 브롱스 천주교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뉴욕 업스테이트에 위치한 콜게이트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하던 정 판사는 부모님의 권유로 1989년 조지 워싱턴 법대에 입학하게 된다.당시 정씨 부부가 델라웨어에서 시작한 비즈니스가 생각보다 잘되고 있었고 큰 딸 유경씨가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 정씨 가족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
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뿐 방학을 맞아 한국 로펌에서 인턴을 하러 가기 전 인사를 하러 오던 정
판사가 빗길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정규동씨는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 갔다”며 “목 아래쪽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죽고 싶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하지만 정 판사는 좌절하지 않았다. 꾸준히 재활 치료로 어느 정도 팔도 움직일 수 된 그는 결국 92년 법대로 돌아갔고 93년에는 브루클린 검찰청 검사로 발령을 받게 된다.이후 정 판사는 99년 최연소 부장 검사 진급, 2004년 벤처 기업가 이수영씨와의 영화 같은 로맨스 등을 통해 결국 2005년 10월 맨하탄 형사 법원 판사로 인명됐다.
사람들은 그를 장애를 딛고 성공한 한인으로 기억한다. 자신의 역경을 이기고 일반일도 올라가기 힘든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정 판사 자신도 무수한 노력을 했을 것이고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을 것이다.하지만,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 이민을 택했던 부모들이 헌신이 없었다면 그 또한 현재 자신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판사석 뒤에 앉아있던 정 판사의 어머니를 향해 재판에 들어오던 사람들이 계속해서 손을 흔들었다는 어머니 이명자씨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준다.
<윤재호 기자> jhyo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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