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전 대통령이 편치 못한 27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영면했다.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검소하고 청렴한, 나라의 어른으로 존경받았을 그가 ‘비운’‘오욕’이란 꼬리표를 달고 착잡한 노년을 보냈다.
최 전대통령의 빈소와 영결식장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인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고인을 ‘비운의 대통령’으로 만든 장본인인 그는 그 죽음 앞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영결식 중 그는 두 눈을 감고 불경을 따라 외우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맺힌 악연을 풀었을까.
최 전대통령의 국민장이 거행되던 시간, 한국에서는 또 한 인물이 세상을 떠났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대부였던 ‘박치기 왕’ 김일씨가 77세로 별세했다. 당뇨, 고혈압, 신부전증 등 지병으로 오랜 세월 고생하던 끝이었다.
‘김일’은 중년층 이상 세대에게는 지금도 가슴을 뛰게 하는 이름이다. 60년대 중반‘김일’은 한국민의 우상이고 영웅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비집고 띄엄띄엄 등장한 흑백 TV, 그 문명의 이기를 타고 레슬링은 오락거리 없던 시절에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었다.
되돌아보면 ‘뽀빠이’류의 만화처럼 경기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초반에 상대방의 반칙으로 고전을 하다가 어느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한 순간 돌연 박치기를 하면 전세가 뒤집히며 그의 승리로 끝나는 것이다. 우리는 손에 땀을 쥐고 그의 박치기가 언제나 나올까 가슴을 졸이곤 했었다.
그렇게 인기를 끌던 프로레슬링이 사양길로 접어든 것은 그의 라이벌 장영철 선수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장씨가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하면서 레슬링 열기는 식고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한국 프로레슬링의 개척자인 장영철, 일본에서 혜성과 같이 등장해 인기를 가로챈 김일, 두 사람의 불화는 필연적인 측면이 있었다. 앙금의 골은 깊어지고, 굳어지며 41년이 흘렀다.
지난 2월초 한국신문에는 가슴 따뜻한 기사가 실렸었다. 경남 김해의 어느 병원. 중풍, 파킨슨병, 약간의 치매 증상으로 볼품 없는 한 노인의 병실로 휠체어를 탄 노인이 찾아갔다. 그 자신 10여년 째 투병 중이던 김일씨가 “죽기 전에 화해를 해야겠다”며 장영철씨를 찾아간 ‘사건’이었다.
젊은 시절 호랑이라도 때려잡을 듯 거구였던 두 사람은 마른 가랑잎 같은 초췌한 몸으로 만나 해묵은 응어리를 씻어내고 여느 노인들처럼 서로의 건강을 걱정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당시 신문에 실린 두 사람의 앙상한, 그러나 정겨운 웃음은 내게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김씨가 26일 별세하고, 장씨는 이미 8월에 세상을 떠났으니, 아마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한평생은 인연들로 짜내려 가는 피륙 같다는 생각이다. 살아가면서 이뤄내는 명예나 부, 권력 등의 성취는 피륙에 덧입히는 금박이나 화려한 염색은 될 수 있어도 인생의 기본 씨줄과 날줄이 될 수는 없다. 부모, 형제, 친구, 배우자, 자녀 … 이 생에서 인연 닿는 사람들과 맺어가는 관계들로 인생은 짜여지는 데 때로 옹 매어져 풀리지 않는 매듭들이 있다. 분노나 증오, 원한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관계들, 악연으로 분류되는 관계들이다.
윤회를 믿는 불교에서는 이 생의 매듭은 이 생에서 풀라고 가르친다. 해결하지 못한 악연은 내 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누군가 지금 나를 몹시 괴롭힌다면 그것은 과거 생애에서 내가 그에게 저지른 악업에 대한 되 갚음이라고 한다.
그런 가르침을 우리가 몸으로써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누구나 경험한다. 울창하던 나무들이 훌훌 잎을 털어내는 계절, 우리도 인생의 매듭들을 풀어냈으면 한다. 너무 늦으면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 것이 화해이다. 화해는 시효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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