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제 5장 제 2차 세계대전>
철길을 따라 들려오는 귀에 익은 기차소리를 듣고 우리는 물론 개들도 제과점 과자를 먹게 되는 줄 알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헌데 부모님의 안색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두 분은 놀라도 크게 놀라고 근심스런, 무슨 일엔가 골몰해있는 표정이었다. 갖고 오신 도넛이 아직 따뜻한데 우리는 손도 안 대었다. 두 살, 네 살짜리 동생들마저 놀란 표정이었다. 그날은 1941년 12월 7일, “오명(汚名)의 날“이었다.
“오명의 날” 폭격을 받은 곳은 우리 섬에서 200마일밖에 안 되는 진주만이었다.
우리 부모님이 한국을 떠난 것은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거니와 일본에 침략당한 고국에서 2등 시민이 되기가 싫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그 일본이 칠천마일도 더 되는 이 하와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제 2의 고국이 된 나라에까지 손을 뻗치는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은 늘 하시던 대로 하와이 말이나 영어단어는 하나도 안 섞인 한국어로만 서로 이야기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나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을 저주하신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구, 아이구” 소리를 내면서 거의 통곡을 하다시피 하셨다. 우리가 사는 곳은 케에아우 신문배포구역 밖이었으나 윌슨 박이라는 소년은 목축장과 우리 집까지 신문을 가져다주었다.
아버지는 특히 2차 세계대전에 관한 뉴스면 뭐든지 관심이 많으셨다. 기사내용이 나쁘면 “개새끼“ 또는 ”망할 놈들“이라고 욕을 하셨다. 그리고는 어머니에게 뉴스를 설명해주셨다. 뉴스가 안 좋으면 어머니는 ”아이구“라고 하셨다. 뭉환 오빠는 대개 저녁 식사 때 아버지에게 전쟁관련뉴스를 얘기해드렸다. 당국에서는 방공호를 지으라고 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 차고 뒤에 자리를 하나 골랐다.
숲으로 약 400보 들어간 지점에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대피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오빠와 아버지는 오르막 기슭에 베드룸 한 개만한 동굴을 팠다.
벽과 천정을 만들고, 그 위에다 파낸 흙을 덮어 방공호를 완서하고, 또 그 위에다가 축 늘어진 무성한 쿠쿠이(kukui)와 레후아(lehua) 나무 가지를 얹어서 카무플라주를 끝냈다. 가까이에는 대형 구아바 나무들과 마일레 덤불들이 썩은 나무 그루터기에 빽빽이 달라붙은 이끼를 가려주었다. 힐로에 가 있던 순이 언니가 주말을 이용해서 집에 왔기에 우리는 언니를 열나게 방공호로 인도했다. 뭉환 오빠는 그러는 우리를 보고 재빨리 다른 길로 우리를 앞질러 가서는 구아바 나무에 올라가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방공호 가까이에 다다르자 오빠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아주 오싹하는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다. “오오...오오...오오...야아아아!” 그 소리에 우리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혼비백산하여 집 쪽으로 다름질 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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