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1년을 기다려 1947년에 우리는 회색 닷지(Dodge) 최신형 승용차를 한 대 소유하게 되었다. 종전 후 새 차 수요가 늘어나서 공급이 부족해진 탓에 새 차는 보기 힘들었다.
윤성은 고 1학년 때 처음으로 새 닷지(Dodge) 차를 올라아 마을로 몰고 갔다. 사람들은 우리의 새 승용차를 눈이 동그래가지고 구경했다. 더러는 웃는 얼굴로, 혹은 손가락으로 저걸 보라는 시늉을 하며. 프랭크 오빠의 친구 제임스는 옛 그리스의 전병(傳兵)마냥 가게들이 서 있는 쪽으로 앞서 달려가면서 프랭크네가 새 차를 샀어요! 프랭크네가 새 차를요! 라고 소리를 질렀다.
영흥이는 집에서 매 주 한 번씩 차를 닦고 왁스칠을 해서 몇 년 동안 새 차 같이 반짝반짝 광나게 만들었다. 프랭크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개월이 지날 때까지 내내 라우할라 제품을 짰다.
우리가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은 혼자서 그 일을 했다. 그러다가 사정이 바뀌었다.
어느 날 아침 작업실로 가는 참에 부엌에 들어가니까 벽에 쪽지 하나가 꽂혀있었다.
저 넓고 푸른 곳으로 떠나요. 프랭크.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고작 14살이었지만 오빠의 심정을 이해하고 또 오빠를 위해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5년 동안 어른 한 사람의 몫을 거뜬히 해냈다.
이제 자기 자신의 앞날을 생각할 때가 된 것이다. 오빠는 18세에 군에 들어갔다.
아버지는 그 쪽지를 보고 우셨다. 나는 아버지가 파자마를 입은 채 부엌에서 침실로 가시면서 들릴락 말락하게 우시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시는 걸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하고 슬퍼졌다.
나 말고 또 누가 아버지가 우시는 소리를 들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처음으로 그 일을 발설한다.
아버지가 우시는 걸 내가 듣고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47년 1월의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모병(募兵)담당관을 만나러 가셨다. 그는 덥수룩하게 생긴 40대 장교였다. 그는 흐느끼면서 프랭크가 8남매 중에 맏아들로 가족의 대들보라는 어머니의 말을 잘 듣더니 동정하는 표정이었다.
집안 사정을 보아 프랭크의 군복무지원은 기각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프랭크가 군복무를 하면 교육의 혜택이 주어지므로 대학을 다닐 수 있을 거라는 말을 신중하게 덧붙였다. 부모님은 눈물이 글성해가지고 좀 의논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오빠의 자원입대를 승낙하기로 결정하셨다.
군복무는 이제 성인이 된 아들이 원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또 학비문제도 해결된다지 않는가. 집안 일은 남은 우리가 어떻게 꾸려갈 수 있을 것이고. 오빠가 집을 맨 처음 떠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부재는 가족들에게 충격이었다. 오빠는 어머니와 함께 앞장서서 라우할라 사업을 이끌어가며 빚을 갚는 일에 필수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오빠는 호놀룰루에서 훈련을 받았다. 휴가를 얻으면 집에 왔다. 여덟 살, 여섯 살 배기 영흥이와 해리는 오빠가 군복을 입고 건장한 모습으로 우리 동네 시골길을 따라 걸어오는 게 보이면 즉시 그쪽으로 달려가곤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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