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용암분출과 화재 말고도 민방위직원들은 가뭄, 홍수, 악천후, 유독가스, 해일 등 숱한 도전을 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Big Island라고 하면 대개 비를 연상하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섬에는 가뭄이 들어서 어떤 농촌지역과 농민들은 재난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악천후 시에 큰 어려움을 겪는다. 위에 말한 1983년의 가뭄은 특히 와이메아(Waimea) 주변 농민들에게 큰 재난이었으니, 곡식이 시들어버리고 물이 부족해서 말라죽었기 때문이다. 민방위와 기타 주정부 기관들은 협동하여 물의 사용량을 제한함으로써 가뭄으로 인한 물 부족 문제를 해소시켰다. 각 가정에서 욕탕 대신 샤워를 하도록 권장하고, 잔디/정원은 이른 아침이나 저녁 해가 진 다음에 물을 주도록 했다. 주(州)관할 저수지의 물도 공급되었다.
1984년 5월에는 우리 김씨 가정도 재난을 당했다. 어머니 미세스 김 야물이 82회 생신을 한 달 앞두고 주무시는 중에 숨을 거두신 거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에 유언장을 작성해 두셨다. 당신 개인과 사업에 관련된 일은 다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전부터 일본계 <고덴 클럽> 회원이라는 내용이었다. 고덴클럽에서는 회원이 타계하면 장례비를 부담함으로써 당사자 가족의 짐을 덜어준다. 어머니 장례식에는 우리 팔 남매와 손자손녀 열여섯이 다 모이고 조문객은 약 200명이었다.아리요시 주지사는 화환을 보내왔다. 장례식은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잘 거행되었다. 돌아가시던 날도 어머니는 여느 때처럼 일을 하셨다.
김치사업도 주관하시고. 떠나시기 한 달 전 어머니는 나에게 당신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맏딸 순이가 어머니한테 각별하기도 했거니와 (항상 곁에 있어주고 또 쇼핑도, 라스베가스에도, 손녀 졸업식에도 데려다 주고해서) 낳은 자식 모두가 혼자 힘으로 공부하고 전문직을 얻었으니 더 바랄 게 뭐냐. 당신 역시 누구한테 신세 안 지고 살아왔으니 남부끄럽지 않고 하니 그만했으면 행운이지. (어머니의) 아버지, 동생, 쉬프먼씨, 이웃사람들, 사업으로 알게 된 분네들, 교회 성도들, 또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을 다, 어머니가 태어나 만난 이들은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람들 아니었는가 말이다 김치사업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10년 동안 더 계속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김치가 그전의 맛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님은 비록 학식은 없었지만 기억력과 상재(商才), 결단력, 그리고 카리스마가 뛰어나 사업이 성공했다.
<하와이 민방위행정관>으로서 해리는 한국, 온두라스, 프랑스, 아이슬랜드 등 여러 나라로 초청받아 갔다. 해리는 그 자리에서 24년간 봉직하고 2000년에 은퇴했다. <케에아우 김치>는 1954년에 시작하여 30년이 지난 1994년에 끝났다. 우리 집의 마지막 라우할라 직공이던 한성이는 1956년에 공부를 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케에아우 김치>는 어머니가 키우신 사업이었고 또 어머니는 그걸 자립으로 일구셨다는 데 대해 자부심을 느끼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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