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와이 한인이민 104주년 특별 연재, 빅 아일랜드 해리 김 시장의 가족 이야기
▶ 맹도티 쉬러 저, 신명섭 교수 역
6년이 지난 지금도 해리는 Big Island 민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받는다.
2006년에는 UN이 독일 Bonn시에서 주최하는 <제3차 초기경보에 관한 회의>에 연사로 초대되어 갔었다. 미국 대표 3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해리와 그의 참모들이 세운 Big Island 민방위 시스템은 이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해리는 거기에 걸맞은 연사가 된 것이다.
하와이 카운티의회에서는 1983년 그의 공적을 가리켜 지칠 줄 모르는 헌신적인 노력이라 치하했고 본고장 사람들 중에는 그를 우리 섬의 영웅으로 추대한 이들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하와이 국제비즈니스 커뮤니케이터협회>에서는 해리를 1994년 하와이의 커뮤니케이터로 지명하였고 또 같은 해에 <하와이 의료협회>는 본분을 초월한 커뮤니티 서비스라고 경의를 표했다.
제 12장 하와이 카운티시장
“지원자” 해리 김
해리는 공화당에서 몇 년간 연이어 시장에 출마해달라는 부탁을 거절했다. 2000년도에는 전혀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리더러 출마하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해리가 시장에 당선되면 특정 이익단체의 꼭두각시 노릇 같은 거 하지 않고 청렴결백한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해리는 특히 어떤 나이 드신 분이 신뢰할 수 있는 정부를 당부한다는 말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해리는 시장지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다른 안건은 일체 내걸지 않고 다만 정부에 신뢰감을 불어넣겠다, 누구한테도 특혜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오로지 자격을 갖춘 사람들 중에 대민봉사만을 염원하는 각료를 만들어 일하리라는 각오로 출마했다.
그 여하한 단체나 개인에게도 신세를 지지 않을 것이다며 기부금은 일 인당 미화로 10달러 이상은 받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해리 김 시장지원자는 자기 집을 캠페인 본부로 삼아 유세를 벌였다 (자택을 선거본부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직원역할은 거의 가족들이 맡았다. 아내인 바비(Bobbie)는 재정을 담당하고. 처음에 제일 큰 비용은 <시장지원자 해리 김>이라고 쓴 포스터를 만드는 데 들어갔다. 해리는 그런 포스터를 신중히 선택한 교차로와 안전치 못한 지점으로부터 최소한 100피트 떨어진 곳으로 들고 갔다. 큼직한 포스터를 들고 혼자 길가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운전자들)과 시선을 맞추며 손을 내흔들었다. 알로하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그러는 모습은 키가 크고 깡말라 보였다.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사람들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즐겁게 크락숀을 울렸다. 손짓으로, 말로 응원을 해주었다.
어떤 이들은 차를 세우고 내려서 해리와 말을 나누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10달러 찬조금을 건네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함께 서서 유세를 했다. 그렇게 홀로 캠페인을 하는 해리의 모습은 그가 남의 신세를 안 지고 뛴다는 독립심과 겸허한 선거자금을 반영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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