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잠이 깨서 보니 마루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어요. 밖을 내다보니 보름달이 환하게 밤을 밝히고 있더군요. 싱숭생숭해져서 마당으로 나갔죠. 아, 그날따라 보름달이 어쩌면 그렇게 크고 아름답던지요.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그 감동을 시로 읊고 싶은 욕망이 마구 솟는 거예요. 달빛 아래 서서 시귀를 생각해봤죠. 근데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를 않는 거예요. 달빛에 젖은 잔디, 꽃, 나무들을 둘러보며 한참을 그렇게 서 있는데도 아무 단어도 떠오르지 않더군요. 마음이 너무 답답하고 아팠어요.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습작을 하면 뭐해요. 자연스럽게 글이 솟아 나와야 될 그런 순간에 꽉 막히고 마는 데요”
한 달에 한번 있는 옆 도시 문학동우회 모임이었다. 회원들이 한인회보에 글도 쓰고 모임에서 자작 글도 발표하는데, 한 회원은 책 읽다가 좋은 글귀가 있으면 몇 쪽이건 다 베껴 와서 읽어 준다. 그 노트가 몇 십권 될 정도로 글을 사랑하는 아마추어 시인인 그가 그날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하소연했다.
엊그제는 한 미술가를 만났다. 지난 학기에 우리 도시 한인들을 대상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기초 미술을 무료 강의했던 한인이다. 첫 시간에 ‘자신’을 그려 보라 하니 처음엔 모두 난감해하더라고 했다. 그래도 결국은 모두 뭔가를 그렸지만 한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백지를 냈다고 한다.
그것을 들고 ‘참 잘 그렸다’고 평하니 사람들이 기막혀 하더란다. 본인이 아무 것도 표현할 수 없거나 표현할 필요가 없거나 아니면 자신이 하얗다고 생각한다는데 뭘 더 요구하느냐고 했더니 그제야 모두 고개를 끄떡 거리더란다. 강사로서 초보자 격려 차원에서 그렇게 말했단다.
미술은 그런 면에서 편리할 때가 있지만 문학은 그렇지 못하다. 이상의 오감도 등 시각을 이용한 모더니즘 작품이라 해도 뭔가 써 넣어야 한다.
문학공부를 한 후 전산학을 전공해서인지 난 컴퓨터 프로그램 쓰는 일과 글 쓰는 일을 같다고 본다. 프로그램 첫 강의 시간에 그런 얘기를 하면 학생들은 모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학기말이 되면 모두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떡인다.
프로그램은 프로그램 언어의 일반용어, 특수용어, 관용어, 문법 등을 이용해서 목적하는 바 즉 주제를 끌어낸다. 수준이 높아지면서 에러가 심해지니 끊임없이 쓰고 또 다시 쓰는 습작을 하며 밤을 새게 된다.
하지만 습작을 많이 하고 훌륭한 용어와 문법을 이용해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했어도, 구성이 좋지 않으면 좋은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다. 뼈대가 단단한 구성은 창작력과 지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다른 참고서나 다른 프로그램 언어를 공부하게 된다. 그처럼 글짓기와 똑 같은 과정을 겪으니 프로그래머도 문인인 것이다.
대개의 문인들이 앞의 회원이 겪었던 관문을 지난다. 하지만 어느 날 운 좋게 좋은 글귀를 끌어내다 해도 마친 글을 보면 멋진 단어를 기교 있게 나열한 것에 불과한 ‘골다공증’ 있는 프로그램 같은 때가 더 많아 보인다. 그 두려움에 떠는 나도 인생의 의미를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지금까지 사물의 진리, 남의 인생과 사상에 열심히 귀 기울이려 노력한다.
앞의 문학동우회 회원들은 매달 자작 글 발표 후 평을 받는다. 칭찬은 생략하고 혹평만 하자고 했지만 마음 여린 사람들이라 혹평다운 혹평을 조심한다. 단 한 마디가 뼈가 부실한 글에 칼슘이 되어 글의 골다공증을 막을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나 역시 가끔 모임을 마치고 돌아서면서 ‘그걸 얘기해 줄 걸’ 하며 용기 없었던 것을 후회하는 때가 있다.
다음 모임에선 나부터 이 글을 읽어주고 명확한 골다공증 진단조사를 강요해야겠다. 서로 골다공증 작가 만드는 것을 그만하자는 부탁과 함께.
김보경 수필가,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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