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대통령’
열흘 후 행운의 새 대통령 탄생을 앞두고 온 미국이 떠들썩하지만 한국에선 요즘 비운의 두 대통령을 추모하는 행사가 조용히 열리고 있다. 내일(26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날이고, 22일은 바로 그 박통의 뒤를 이은 최규하 대통령이 별세한 날이다.
70년대 중반이후 이민 온 한인들은 최 대통령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분명히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이다. 그는 박통이 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 1979년 당시 국무총리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가 전두환의 신군부에 밀려 8개월 만에 하야했다.
이상한 때, 이상한 자리에 있다가 이상하게 출세해서 이상하게 밀려났고, 그 상황을 4반세기가 넘도록 이상하게 비밀로 지키다가 2년 전 조용히 별세한 한국의 최단명 대통령. 그와 이상한 인연이 있는 필자는 사흘 전 그의 기일에 만감이 교차했다. 생전에 그가 이상하게 애착했던 2급 담배 ‘한산도’라도 한 가치 피워 물고 싶은 이상한 충동이 일었다.
그는 대통령 외교특보를 거쳐 1975년 말 국무총리(서리)로 임명됐다. 70년대초부터 중앙청(총리실) 담당기자였던 필자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남들은 ‘실세총리’(김종필)와 함께 중앙청 기자실도 한물갔다고 개탄했지만 필자는 당시의 유신독재 상황에선 정치총리 아닌 ‘관료총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었다. 신년특집을 위해 그를 인터뷰할 요량으로 외무장관 재임시절 그와 친분을 쌓았던 정치부장을 모시고 무조건 그의 집을 찾아갔다.
재상에 임명된데다 다사다난한 연말이므로 십중팔구 집에 없거나 있어도 면회사절일 것으로 예상했던 필자는 그날 많이 놀랐다. 서교동의 새 주택단지에 있는 그의 2층집은 옆집과 똑같은 중산층주택이었다. 문패를 확인하고 대문을 두드리자 강아지가 짖어댔다. 경호원도, 비서도, 가족도 아닌 최 총리 자신이 대문을 열어주고는 “웬일이슈?”라며 놀랬다. 권총 찬 경호원이 언제나 서너명씩 따라붙었던 JP의 이미지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가 안내한 응접실도 좁고 수더분했다. 퇴색한 탁자 위에 예의 한산도가 놓여 있었다. “인터뷰는 싫고 적적한 데 잘 왔으니 저녁이나 함께 먹자”고 했다. 훗날 영부인이 된 홍기여사가 손수 차려준 저녁을 먹으며 2시간가량 ‘한담’을 나눴다. 그동안 하객은 물론 축하나 문안 전화도 걸려오지 않았지만 최 총리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 했다.
그는 총리재직 4년 만에 박통이 암살되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고 그 해 12월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간선으로 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윤보선에 이어 임기 중 쿠데타(12·12사태)를 겪은 두 번째 대통령이 됐다. 유신헌법 개정 등 자신의 공약을 신군부의 위세에 눌려 시도도 못 해본 채 1980년 8월16일 물러나 서교동 자택으로 돌아왔다.
90년대에 문민정부가 신군부의 비행을 파헤쳐 전두환과 노태우를 감방에 보냈지만, 당시 상황을 가장 잘 알뿐 아니라 가장 큰 피해자일수도 있는 최 대통령은 끝까지 입을 다물어 ‘자물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신군부의 집권을 묵인 또는 방조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추측도 있었지만, 본인의 소신은 “전직 대통령은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서교동 방문 후 필자가 쓴 신년특집 기사의 제목은 ‘평민총리 경호원은 강아지’였다. 그는 정치인, 관리, 외교관이기 전에 선비(서울대학교 교수)였다. 40년 공직생활 중 단 한 번도 비리나 스캔들에 연루되지 않은 청백리였다. 한산도 담배만 피우며 2003년까지 연탄을 땐 서민이었다. 치매에 걸린 부인의 병실을 10여년간 지킨 착한 남편이었다.
그는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패한 대통령’이 아니라 ‘때를 잘못 만난 대통령’이었다. 앞으로 그만한 대통령 감이 다시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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