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허실(虛實)
사흘이 후가 기다려진다. ‘최초의 흑인대통령 탄생’을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려고 안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역사적’ 신문은 전에도 만들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워싱턴 주지사 선거도 내심 심드렁하다. 크리스 그레고어가 재선되든, 디노 로시가 설욕하든 대다수 한인들에겐 ‘그 밥에 그 나물’이다.
필자가 사흘 후를 기다리는 이유는 따로 있다. 지겨운 흑색광고가 끝나기 때문이다. 상대후보를 헐뜯는 저질 TV광고를 안 볼 재간이 없다. 어느 채널을 돌려도 똑같은 광고가 쏟아진다. 본보와 시애틀타임스 등 모든 신문이 광고가 없어 지면을 줄이는 판에 TV는 선거특수를 톡톡히 누린다. 시샘이 아니다. 후보자의 자금사용(광고)과 관련한 시애틀의 한 TV방송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100%가 “법으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자 말고도 많은 한인이 이번 선거에 시큰둥하다. 작금의 경제난에 찌들려 흑인대통령 탄생에 흥분할 여력이 없다. 그렇긴 해도 오바마의 ‘젊음’(46세)에 기대를 거는 한인들이 있기는 있다. T. 루즈벨트(42세 당선), 케네디(43세), 클린턴(46세) 등 같은 민주당의 선배 ‘40대 기수’들이 경제위기를 잘 극복해낸 선례가 있기 때문이다.
주지사 선거도 비슷하다. 4년 전에 당선되고도 3차 재검표 끝에 133표차로 뒤집힌 후 와신상담 해온 로시의 올림피아 입성여부에 호기심 수준의 관심을 보이는 한인들이 있다.
한인들이 이번 선거에 크게 관심을 가질만한 근거도 사실은 없다. 기대를 모은 손창묵 후보(주 재무장관)는 8월 예선에서 뜻밖에 탈락했고, 지명희 후보(킹 카운티 판사)는 본선과 관계없이 당선이 확정됐다. 임용근, 김영민 후보가 민주당 텃밭에서 공화당 티켓으로 주하원에 출마해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고조된 오리건주 한인사회와는 상황이 다르다.
지난주, 알고지내는 김 할아버지(80대 중반)가 부재자 투표지를 필자에게 떠넘겼다. 한국에서는 한동안 대통령선거가 없어서, 이민 와서는 시민권이 없어서, 막상 투표권자가 된 뒤에는 영어를 이해할 수 없어서, 그동안 한 번도 투표를 못 해봤다고 했다. 다음 선거 때까지 살아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므로 이번에 꼭 한 표를 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투표지를 열어 항목별로 설명해주고 어디에 찍겠느냐고 물었다. 김 할아버지는 선거 후보들은 모조리 민주당을 찍겠다고 말했다. “오바마를 좋아하시느냐”고 물으니 “그게 아니라 옛날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 대한 인상이 안 좋다”고 했다. 한국 공화당과 미국 공화당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설명해도 ‘공화당은 공화당’이라며 막무가내였다.
공직자 투표는 1분 만에 끝냈지만 문제는 복잡다단한 주민발의안과 각종 징세안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불치병 말기환자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한 I-1000(’존엄사법’ 발의안)에는 관심을 조금 비쳤지만 팀 아이만의 I-985(교통체증 완화 발의안) 등에는 귀찮다는 듯 “알아서 찍어주소”라며 손사래를 쳤다. 김 할아버지와 필자의 주거지역이 달라 필자가 모르는 내용의 징세안도 있었다. 그런 항목들은 모두 기권처리 됐다.
김 할아버지를 도와드렸지만 심기가 불편했다. 선거의 허실을 절감했다. 한인사회에선 선거가 여전히 결과 아닌 과정에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다. 신문이 독자들에게 투표방법을 충분히 알려주지 않았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유권자등록 캠페인도 필요하지만 투표지를 받은 유권자들이 모두 투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더 긴요하다고 느꼈다. 다음 선거 때 본보를 비롯한 언론과 사회기관 및 단체들이 유념해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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