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위인
죽은 후 남들로부터 “고인 덕분에 이 세상이 한층 더 살맛났었다”는 찬사를 듣는 사람이면 누가 뭐래도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일 것이다.
고인을 위한 추도행사가 두 번이나 열려 1,700여 조객이 참석했고 내로라하는 각계 명사들이 두루 얼굴을 내밀었으니 그는 분명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인들은 대부분 모르고 지났지만 그런 추도식이 지난 12일 다운타운 퀘스트 필드에서 열렸다. 시혹스 풋볼 팀의 스타 플레이여가 죽은 게 아니다. 행사장인 이벤트센터를 꽉 메운 1,500여 조객은 대부분 검정 넥타이 대신 우스꽝스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들은 유가족 대표의 조사가 끝나자 일제히 일어나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그에 앞서 8일엔 음악가들을 위주로 한 150여명이 시애틀센터에 따로 모여 음악 추도식을 가졌다. 워싱턴대학(UW) 밴드 대원들은 허스키스 풋볼경기의 하프타임 연주를 끝내고 “티-유-비-에이-엠-에이-엔(Tuba Man)”이라고 외쳤다. 12일의 퀘스트 필드 추도식에도 시애틀심포니의 전·현직 수석 튜바 주자들이 참석해 조가를 연주했다.
추도식의 주인공은 바로 ‘튜바 맨’이었다. 지난 20여년간 불려온 에드워드 맥마이클의 별명이다. 거리의 악사였던 맥마이클은 퀘스트 필드와 그 전신인 킹 돔을 비롯해 세이프코 필드, 키어리나, 허스키스 스타디움 등에서 주요 경기가 열릴 때마다 나타나 출입구 옆에서 튜바를 불었다. 덥수룩한 얼굴에 동물모양의 웃기는 모자를 쓰고 적선용 깡통을 앞에 놓은 채 낡은 대형 금관악기를 부는 그의 모습은 이내 시애틀의 명물이 됐다.
경기장 직원들의 배려로 무료입장 혜택을 받은 그는 경기가 끝나기 반시간쯤 전에 밖으로 나와 홈팀이 승리하든, 패하든 신나는 응원가를 불어 제켰다. 사람들이 환호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답례했다.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는 80년대 전까지 벨뷰 필하모닉과 캐스케이드 심포니 등에서 정규단원으로 튜바를 연주했었다.
그런 그가 지난 달 말 시애틀센터 인근 버스 정류장에서 14~15세 깡패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한 후 1주일만인 지난 3일 숨을 거뒀다. 깡패들은 그에 앞서 다른 청소년 두 명을 두들겨 패고 돈을 빼앗았다. 경찰은 현재까지 용의자 5명 중 3명을 체포했다.
튜바 맨은 죽은 뒤 더 유명해졌다. 시애틀의 모든 일간신문과 TV방송이 그의 비보를 대서특필했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에는 그를 기리거나 깡패들의 엄벌을 요구하는 글이 일주일 내내내 넘쳐흘렀다. 시애틀타임스는 13일 이례적으로 튜바 맨의 추도사설까지 게재하고 그의 장례식과 묘비 제작 등을 돕기 위해 일반인들의 기부금을 모은다고 밝혔다.
KOMO-TV의 인기 해설가인 켄 슈람은 퀘스트 필드 추도식에서 “에드 맥마이클이 있음으로서 시애틀과 이 세상은 한결 좋은 곳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시혹스 구단주 토드 레이위크는 튜바 맨을 기리는 ‘12번 선수’ 응원기를 퀘스트 필드에 게양하겠다고 말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척 암스트롱 사장은 아들이 쓴 추도사를 대독하며 울먹였다.
필자는 지난 2주간 튜바 맨을 둘러싼 일련의 해프닝을 지켜보며 아리송했다. 한낱 걸인 악사일 뿐인 튜바 맨이 죽은 후 왜 이처럼 엄청난 사회적 추앙을 받는 것일까? 그가 어엿하게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생을 마쳤다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그의 삶이 특이했고 죽음이 특이했기 때문일까? 삶이 특이했지만 성공적이었거나 존경받을만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미국에서 30년간 살고도 아직 미국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음을 절감한다.
윤여춘(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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