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K 엄마인데 K가 갑자기 아파서 응급실에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수업에 못 들어갈 것 같아서 전화를 드립니다”
강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니 음성메지시가 세 통 들어와 있었는데, 첫 번째 메시지였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수업인데, K가 무단결석을 해서 신경이 쓰였던 터라 일단 안심을 하긴 했는데, 대학생의 엄마가 아이의 결석을 알리는 전화 메시지를 남긴 것이 고맙기도 하면서, 한편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아직도 엄마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한 학생일까… 몸이 약해서 이런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생일까… 모녀 사이가 아주 각별한 학생일까… ”
두 번째 메시지도 역시 K 엄마였는데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집으로 왔다는 상황 보고였다. 세 번째 메시지는 K 자신이 남긴 메시지였다. 오늘 강의를 빠져 성적에 지장이 있을까봐 염려되고, 결석을 보충할 수 있는 과제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성실한 학생임이 틀림없었다.
며칠 후 학습장애에 관해 강의하는 도중, 학생들에게 자신의 학습장애 내지는 극복하고 싶은 학습습관에 대해 나누도록 했다. K가 선뜻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했다. 시험지만 받아들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고 했다. 교과서를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해도 시험지만 받아들면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급기야 전문가로부터 강박관념이라는 진단을 받아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후로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하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든다고 했다. 며칠 전에 결석했을 때 취한 아이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다음에는 K의 옆자리에 앉아 늘 강의에 경청하고 토론에 진지하게 임하는 A가 자신의 경험담을 나누었다. 자라면서 남동생보다 머리가 좋은데 성적이 늘 뒤져서 부모님한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 “너는 노력을 안 해서…”숙제도 꼬박꼬박하고 시험을 앞두고는 복습도 열심히 했건만 성적은 늘 하위권에 맴돌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11학년 때, 수학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시험지가 노란색이었다고 한다. 교사가 복사기에 노란 종이가 들어있는 걸 모르고 시험지를 복사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노란 종이에 프린트 되어있는 시험문제를 푸는 동안 집중이 잘 되었고 문제들이 술술 풀리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난생 처음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고, A는 자신의 경험이 너무 신기해서 부모님과 수학교사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전문가에게 상담을 의뢰했고, 뜻밖에도 ADD (집중장애)로 판명이 났다고 한다. 노란 색이 집중을 하는데 도움이 된 것이었다. A 역시 꾸준한 상담으로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생겨 대학도 정상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너덧 명의 학생들이 자신들의 크고 작은 학습장애 내지는 학습습관에 대해 솔직히 나누었다. 자신들의 경험이 앞으로 교사가 되면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들 했다.
나도 첫 강의 날 나의 장애를 고백했었다-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장애. 강단에서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늘 아이들을 대하고 사는 내게 이것은 참으로 난처한 장애이다. 이름을 익히는데 시간이 걸리고, 이름을 익힐 만하면 학기가 끝나고, 그와 함께 다시 백지상태로 돌아가는 그런 장애. 나름대로 애를 쓰건만 극복이 안 되고 있다. 이런 나의 장애로 상처를 받은 학생들도 적지 않으리라.
그래서 이번에는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학생들에게 협조를 청해 그룹 별로 사진을 찍어 이름을 적어놓고 숙제하듯 매일 공부했다. 효과가 있었다. 이제 학생들은 내가 이름을 불러주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엄지를 들어 보이며 격려를 해준다. 아주 잘하고 있다는 무언의 격려!
아, 그러나 여름 학기가 끝나고 가을에 교정에서 이 학생들과 마주치면 나는 과연 이들의 이름이 생각날까. 벌써부터 겁이 난다.
이영옥/ 수필가·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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