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휠체어를 써야 하는 79세의 노인이 텍사스에서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캐나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텍사스 공항에서 직원의 잘못으로 틀린 터미널에서 몇 시간 동안 하염없이 휠체어에 앉아 있다가 비행기를 놓치고는 다음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시카고를 경유해야 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기상관계로 연착이 예상되었고, 그리되면 캐나다행 비행기를 놓칠 것이 빤한 상황이었다. 이미 텍사스 공항에서 오랫동안 휠체어에 앉아 있어 지쳤던 노인은 이제 다시금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입이 바싹바싹 말라오고 허기도 몰려와 쓰러질 것 같았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어서 주머니에는 돈도 몇 푼 없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감추고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무심코 통로 건너편의 윤이 나는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노인이 어릴 적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옷매무새가 단정한 사람은 자신과 남을 존중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이었다. 노인은 용기를 내어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의 주인공인 중년의 신사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과 신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노인의 상황을 파악한 신사는 오헤어 공항에 도착하자 노인을 자신의 집으로 모셔가 부인과 함께 노인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호텔에 방을 잡아주고, 공항에 가는 차편까지 미리 주선해서 다음 날 아침 노인은 무사히 캐나다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간 노인은 신사의 친절을 잊을 수가 없어 지역 신문을 통해 시카고에서의 이야기를 알렸고, 그 흐뭇한 이야기는 시카고 트리뷴지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나라면 어땠을까? 출장에서 돌아오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늘 그랬듯이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이다. 노인이 말을 걸어와도 건성으로 대꾸하는 척 했을 것이고, 고작해야 승무원에게 노인의 처지를 설명하고 휠체어를 부탁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리라.
노인의 어머니가 평소에 말했다는 옷매무새와 사람됨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신문에 실린 신사와 부인의 사진을 보며 나의 시선이 나도 모르게 신사의 구두로 향하고 있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진에서도 신사의 구두는 반짝이고 있었다.
평소에 웬만하면 청바지 차림의 편안한 캐주얼을 즐겨 입어 신발에 그리 신경을 안 쓰고, 발이 넓어 편한 신발을 선호하고, 일단 발에 편해지면 버리지 못해 낡(아빠지)도록 신기에, 기사를 읽으며 ‘윤이 나는 구두’에 관심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노인의 시선이 나의 투박하고 낡은 구두에 머물렀다면 노인은 내게 말을 걸어오지도 않았을까?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정타는 뭐니 뭐니 해도 노인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노인은 신사가 호텔방을 잡아주며 “새 칫솔과 치약까지” 준비해 주어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미시간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신사의 멋진 콘도에서의 저녁식사도, 평소에 여유가 되지 않아 묵어보지 못했던 호텔도 제치고 노인의 가슴에 쓰윽, 하고 획을 그으며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은 ‘새 칫솔과 치약’이었다.
신사의 세심한 배려였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이렇게 작은 것에서 오는가 보다.
이영옥 / 수필가·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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