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한미군, 일 국방 방패구축. 일본 2개사단 비용 규모 제공해야
레이건 답변없이 회담 종결.헤이그장관 최선 다할 것 답변
회담 2년후 나카소네 한국방문 40억달러 경제협력 지원 합의
전두환 전 한국 대통령은 1981년 2월 로날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가진 백악관 한미정상회담에서 국군과 미군이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안전도 지키고 있음을 주장하며 일본이 국군 2개 사단 병력 군사비용에 해당되는 경제적 지원을 한국에 제공토록 할 것을 제안한 사실이 미국 정부 비밀해제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국가안보기록’ 연구소가 ‘정보자유법’(FOIA)을 통해 미국 정부와 레이건대통령도서관으로부터 입수, 지난 2일 공개한 ‘전-레이건 정상회담’ 비밀해제 문서들에 따르면 당시 한국은 한미정상회담을 이용해 한국 정부의 국방비 지출로 간접적 안보혜택을 보는 일본이 ‘한국 국방’에 약 10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추진했다.이 같은 사실은 전 대통령과 레이건 대통령이 1981년 2월2일 백악관 대통령집무실(Oval Office)에서 간단한 회의를 가진 뒤 ‘내각실’(Cabinet Room)로 옮겨 양측 보좌관들이 참석한 가운
데 진행된 정상회담 내용을 도날드 그레그 당시 ‘국가안보위원회’(NSC) 직원이 요약, 정리한 ‘대화 비망록’(Memorandum of Conversation)에서 확인됐다.
비망록은 “전 대통령은 레이건 대통령의 견해에 감사를 표하고 오찬을 위해 (회담을) 끝내기 전에 경제 문제들을 언급해도 되는가를 의뢰했다. 전 대통령은 과거에 미국의 원조로 인해 한국 경제 성장이 늘어났음을 주목했다. 전 대통령은 또 일본은 미국의 경제 파트너로서 미국의 원조와 보호로 인해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음을 주목했다”고 기록했다.비망록은 또 “전 대통령은 일본이 자위를 향해 더욱 노력할 것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밝히고 일본이 ‘한국 국방에 투자를’investing in ROK defense)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며 “전 대
통령은 일본이 한국에 2개 사단 비용에 해당되는 규모의 경제 지원을 제공하도록 권장하는 것을 제안했다”고 밝혔다.
비망록은 이어 “전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현재 ‘국민총생산’(GNP)의 6 퍼센트를 국방에 지출하고 있는데 비해 일본은 불과 0.9 퍼센트를 지출하고 있음을 주목했다”며 “전 대통령은 미국과 한국이 서로 협력해 일본이 미군과 국군은 일본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고 국방 지출 차원에서 더 (기여)하게끔 만들 것을 촉구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관련 그레그가 작성한 ‘대화 비망록’은 전 대통령의 제안에 레이건 대통령이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회담이 종결된 것으로 돼 있다.그러나 전 대통령은 오찬이 끝난 뒤 같은 날 오후 국무부를 방문,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부 장관과 가진 회의에서 이 문제를 또 다시 언급, 헤이그 장관으로부터 미국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미 국무부가 1981년 2월6일 주한미대사관에 보낸 ‘전(두환) 한국 대통령과 장관과의 국무부에서의 회의’라는 제목의 전보는 “이와(경제 문제들) 관련 전 대통령은 일본이 지역 안보 유지부담에 더 큰 비율을 짊어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미국과 한국이 함께 일본 국방의 방패(bulwark)를 구축하고 있으며 일본의 더 큰 재정 지원과 부담 분담이 요망 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보는 특히 이 대목에서 괄호에 “참고로 이후 있었던 대화에서 신(병현) 국무부총리는 한국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최고 10억 달러까지의 ‘소프트론’(soft loan)을 기대하고 있음을 비추었다”고 덧붙여 당시 전 대통령의 방미 목적 중 하나가 미국의 일본에 대한 한국 경제 지원 압력을 이끌어 내는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실제로 국무부 전보는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제안에 대해 헤이그 장관이 “우리도 경제 분야에 있어 일본 친구들과 종종 문제들이 있었다”고 답한 뒤 “미국은 무역 장벽 수단에 의지하는 관계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도쿄에 있는 친구들과 일종의 더욱
엄밀한 경제 대화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전보는 이어 헤이그 장관이 전 대통령에게 “우리는 우리와 한국과의 관계에 있어 여느 때와 다른 한국의 현 경제적 어려움을 돕기 위한 방법들을 찾을 것이며 우리와 일본과의 대화 차원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라고 전한 내용을 담고 있어 그 후 레이건 미국 정부가 일본을 상대로 어떠한 실제 영향을 행사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한편 전-레이건 정상회담이 있은 뒤 불과 2개월만인 1981년 4월 한국은 대일 차관교섭을 제기했으며 1982년 11월25일 제11대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에 당선된 뒤 바로 다음날 제71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지명된 야수히로 나카소네는 1983년 1월11일 현직 일본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공식 방문해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21억5,000만 달러 등 총 40억 달러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했다.레이건은 1983년 11월14일 한국을 답방, 전 대통령과 청와대 정상회담을 가졌다.
<신용일 기자> yishin@koreatimes.com
전두환 전 한국 대통령과 로날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81년 2월2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있다.<사진=로날드 레이건 도서관/NSA 연구소>
■‘전이라는 인물’(Chun as a Man)
전 대통령은 한국 군사 학교의 첫 정기 4년 프로그램을 거친 1기 졸업생입니다. 전은 1959~60년 미국에 와서 육군의 특전과 보병학교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전은 1970~71년 월남에서 싸웠으며 그 곳에서의 군무로 ‘미국 청동성장’(U.S. Bronze Star)을 받았습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전의 모든 경력은 완벽하게 군대였습니다. 그는 고 박(정희) 대통령을 매우 존경 하는 사람이지만 박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던 분야들에 대해 예리한 이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전은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에 비교적 여유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그는 깨우침이 빠르며 능란한 정치적 수법을 재빨리 계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전은 1월12일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에게 남쪽을 방문하라는 전제조건 없는 초청을 발포했습니다. 이는 북한을 수세에 몰아넣는 약빠르고 시기적절한 조처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아마도 이 같은 자발스러운 정치적 제스처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을 것입니다.
군에서의 전의 지반은 튼튼한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군과 자신과의 거리를 두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넓혀 자신이 단순히 사복을 입은 전직 장군이라는 것 이외의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와의 이번 만남은 그가 그러한 방향으로 다가가는 커다란 걸음걸이가 될 것입니다.<전두환 대통령과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1981년 2월2일 백악관 정상회담을 앞두고 리차드 알렌 국가안보고문이 같은 해 1월29일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달한 ‘한국의 대통령 전’이라는 제목의 비망록 내용 중>
1983년 11월14일 한국을 답방한 로날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로날드 레이건 도서관/NSA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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